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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둥지 Aug 30. 2022

EP2. 내 자취방에 낯선 남자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구리긴해도 여긴 나만의 공간인데


"이 쪽에는 이런 방밖에 없어요"


자취방을 구하기 위해 부모님과 처음 학교 주변을 돌아다닐 때 중개인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지역 특성상 상하수도 시설이 좋지 못했고, 그래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방들은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집에서는 하수구 냄새가 났고 가구를 조금만 옮겨보면 곰팡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벽은 누가봐도 가벽이었고, 부동산의 'ㅂ'자도 몰랐던 내가 봐도 불법건축물인 것 같은 방들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 집과 학교 사이의 거리가 멀어 자취를 한 적이 있다. 본가가 교통이 좋지 않는 농촌이다보니 늦은 귀가와 빠른 등교에 어려움이 있어 자취를 했다. 보증금 500에 월세 35의 방이었지만, 부엌과 방이 분리되어있는 투룸이었고, 햇빛도 잘 들어오는 좋은 방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보증금 500에 60만원짜리 방도 냄새가 났고 몹시 좁았다. 방을 15개 정도 둘러보고 나니, '이 지역에서 이 가격은 이 정도 상태가 최선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코로나로 자취방이 많이 비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쏙 드는 방을 찾기란 어려웠다. 그래서 그나마 넓고 상태가 좋았던 방으로 계약했다. 하지만 1층이었고, 은은한 하수구 냄새가 났다. 오래된 집이라 창틀과 문이 조금씩 틀어져 벌레와 자주 마주칠 것만 같은 방이었다. 하지만 주인이 보증금을 높이고 월세를 크게 낮춰준다기에 금전적 부담이 가장 적었고(그래봐야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가 25만원이었다), 그 가격대 방 중에는 가장 좋은 방인 것 같았다. 결국 이 방으로 덜컥 2년을 계약했다.

서울에서의 첫 자취방

집주인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집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보니 마찰이 잦았다. 바쁜 집주인과의 연락이 닿지 않아 세탁기가 고장났을 때 2주일 가량 세탁방을 전전했다. 하지만 가장 당황스러웠던 때는 샤워를 하다가 찬 물이 나왔을 때였다. 겨울이었는데 보일러가 고장난 것이다. 기사님을 불러 보일러를 수리하기 전까지 한 겨울에 집에서 패딩을 입고 잤다. 보일러 수리기사님은 보일러가 너무 오래돼서 그렇다며, 당장 비용을 들여 수리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보일러가 다시 고장날 수 있다고 했다. 집주인은 다시 고장나면 그 때 새 제품으로 교환하겠다고 했다. 이후로는 샤워를 할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 찬물이 쏟아지진 않을까.


방이 좁다보니 침대를 놓지 못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수면의 질을 하락시켰다. 무엇보다 2년 살고 이동할 집이라고 생각하니 좋은 가구를 들여놓기도 부담스러웠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이사할 때의 번거로움과 추가비용을 생각해 가장 저렴한 것들로 채워넣었다. 당연히 저렴한 가구들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특히 책걸상이 편안하지 않으니 자꾸 밖으로 돌았다. 주로 학교 도서관에 있거나 카페에서 생활했다. 지금은 이사를 했지만, 첫 자취방에서 살 때는 공간이 불편해서 자꾸 바깥으로 나간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내가 카공을 무척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취방은 잠만 자고 씻기만 하는 공간이 되었다. 자취방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나만의 동굴같은 집이 아니라, 여러 불편함(벌레, 냄새, 고장 등)을 겪고있고 자각하고 있지만 내가 무엇하나 해결할 수 없는 무력한 곳이 되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버틸만 했다. 벌레야 본가에서도 자주 봐왔던 것이고, 화장실에서 올라오는 하수구 냄새는 일주일에 한번씩 락스칠을 하면 그나마 냄새가 조금 덮혔다. 보일러와 세탁기 고장 역시 불편하기는 했으나, 귀찮은 불편함이었지 두려운 불편함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이 자취방에서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땐 1층 창문을 낯선 남자가 냅다 열었을 때였다. 


때는 낮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오후였다. 그 날 아무런 일정이 없었던 나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잠옷차림으로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바닥에 누워있으면 싱크대 상하부장이 보이고 싱크대 바로 앞에 있는 창문은 거의 안 보이는데, 그 작은 시야 속으로 낯선 손과 함께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자취방이 1층이긴 하지만 골목 끝에 있는데다가 유동인구도 거의 없는 곳이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자각을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실제로 1년 넘게 이 집에서 살면서 이런 일이 발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3층에 사는 곧 유치원을 졸업할 남자아이가 내가 집에 없을 때 장난으로 방충망을 반쯤 열어둔 적은 있었지만, 장성한 남자가 언제든 내 창문을 열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창문을 꼬박꼬박 잘 잠그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낯선 손이 내 공간 안으로 불쑥 들어왔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여기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해요?


우리 집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길이 한쪽은 막혀있어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이 하나 뿐이라는 이야기다. 길을 물을 일도, 필요도 없는 곳이다. 한 3초간 얼어붙었다가 일어나서 화를 냈다. 여기 길이 저 오른쪽으로 나가는 길말고 더 있냐, 혼자 사는 집에 이렇게 불쑥 창문 열고 말 거는 게 얼마나 실례인지 알고 있냐, 한번만 더 이러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겠다 인상쓰고 강하게 이야기했다. 구리고 구린 내 자취방이지만, 여기는 내 공간인데 누군가가 허락없이 공간을 침범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그 사람은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곤 사라졌다. 화가 가라앉으니 무서움이 몰려왔다.


방범창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여자 혼자 사는 걸 알았으니 저 사람이 다시 찾아오지는 않을까? 그냥 없는 척할 걸 그랬나? 내가 잠옷이 아니라 속옷만 입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많은 친구들이 여자였기 때문에 겪었던 불안함(지하철에서의 불쾌한 손길, 은근한 성희롱 등)을 호소할 때도 나는 막연하게만 느껴왔다. 키 172이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나는 정형외과에 가면 '종목이 뭐에요?'라는 질문을 들을 정도로 골격이 있는 편이다. 그래서였을까? 친구들이 여자였기 때문에 겪은 일들을 겪은 적이 없었고 그 때문에 서울에서 혼자 사는 게 외롭다고 느낀 적은 있어도 '여자 혼자'살기 때문에 무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날 이후로 나는 창문을 꼬박꼬박 잠그는 습관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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