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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아닌 Oct 19. 2021

그늘에 가까운 빛, 빛에 가까운 그늘

Day 23

나의 오래된 친구가 종종 하던 말이 있다. 쓰레기처럼 술마시고 싶다. 이 말의 뜻은 자신이 요즘들어 쓰레기처럼 술을 마시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쓰레기처럼 술을 마시던 그 시절이 그립다는 것이다. 난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 것 같다. 떠오르는 비유가 하나 있다. 이건 내가 한창 시를 쓰고 배우던 때 소주가 시와 같다며 늘여놓은 이야기다. 소주는 꼭 시같지 않은가. 잔과 잔을 부딪혀서야 술을 마신다는 술자리의 형식은 유리잔이 부딪히는 챙챙 소리를 만드는 외형율 같고 우리는 그 리듬 속에서 술에 취해 제자신을, 그러니 화자를 잃어가기 시작하며 어느 순간에는 나도 모를 내 안의 깊숙한 욕망들을 꺼내놓는다. 난 이 비유가 참 어리숙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요점은 과연 소주가 시를 얼마나 닮았느냐가 아니라 이런 비유를 들던 시절의 내 어리숙함이라고 생각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일 것이다. 이 또한 내 경험에 비추어 하는 말이다. 난 여전히 술을 좋아하므로 어느 때든 난 내가 외롭다는 걸 알고 있고, 혹은 난 여전히 외로우므로 어느 때든 난 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만약 당신이 내가 외로운지 또는 술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면 내가 술을 좋아하는지 또는 외로운지 살펴보면 되는 셈이다) 난 이 외로움이 단순한 적적함은 아니라고 느낀다. 이건 공허함에 대한 감각이다. 어떤 발랄한 분위기 속에서도 기어코 공허함을 감지해내는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들의 예민함은 귀한 것이지만 동시에 버거운 것이어서 자주 그 감각을 잊을 필요가 있고 그래서 자꾸 술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공허함은 취기 어린 눈에는 참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난 죽음에 관한 시를 많이 썼고 누구는 돈을 흥청망청 쓰며 그 낭비하고 소진하는 느낌을 청춘이라 부르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참 반어적이기도 하다. 죽음에 관한 시를 쓰며 그걸 아름답다고 하는 일, 혹은 자기 재산을 낭비하고 소진하는 행위를 두고 청춘이라며 예찬하는 일, 더불어 내 친구의 말과 같이 쓰레기처럼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하는 일. 실은 누구도 죽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재산을 탕진하고 싶진 않았으며 누구도 쓰레기처럼 취해버려서 자기 체면을 내버리긴 싫었다. 그래서 난 술을 사랑하고 술에만 취해 살았던 나의 어떤 시절을 가증스러웠던 시기라고 생각했다. 난 늘 비애에 빠진 사람처럼 행동하며 죽음 곁에 사는 예술가를 꿈꾸었으나 그게 다 기만이었다는 거. 그런데 그게 정말 거짓이고 허풍이었다면 왜 우린 이제와서 다시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쓰레기처럼 술을 마시고 싶다는 말 따위를 하는 걸까.


이제는 그게 기만이 아니었다고 고쳐 생각해본다. 뭉뚱그려서 그 시절의 감각을 '죽음'이라고 말해본다면 그때 나와 친구들의 행동이 꼭 죽음의 흉내는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진짜 죽고 싶었던 건 아닐지어도,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자랑하던 짓들이 다 진짜 죽음은 아닐지어도 그러므로 그게 다 가식은 아니었다. 어쩌면 죽음과 삶 사이에 아주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있듯이, 세상에는 죽음에 한 없이, 정말 한 없이 가까운 사랑과 믿음과 행복도 있는 것이며 그날 우리들의 마음이 바로 그런 것이었음을. 그래서 난 죽음에 한 없이 가까운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그건 과연 무엇일까. 절벽에 떨어지면 끔직하게 죽을 걸 알면서도 절벽에 한 없이 가깝게 걸어가고픈 마음일까. 그 낭떠러지 앞에서 애인과 손을 붙잡으면 내 손에 가득 차는 땀이 내 애인의 손결이 긴장되서 난 땀인지 아니면 저 절벽 아래 죽음이 두려워 난 땀인지 헷갈리기만 한데 그 헷갈림 자체가 매혹적이던 그런 느낌인 걸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계속 그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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