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때아닌 Oct 15. 2021

죽은 가족

Day 19

좁은 집에 여러 사람이 모인다. 이사 오기 전에 집만 하더라도 거실에 사람들이 가득 찼다. 이사를 오고서는 거실이 절반은 줄어서 차례 한 번 지내려면 여럿이 낑겨서야 한다. 예전에는 연휴 첫 날에 온 가족들이 한 저녁을 함께 잤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어디 누울만한 자리가 없다.


차례를 지내는 순서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집안의 큰 아들인 아버지가 하란대로 따를 뿐이다. 오랜 반복학습으로 넘겨짚는 것 하나가 있다면 차례 사이에는 쉬는 시간이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아버님께서 식사하실 시간을 드리자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느 자리에서 제사음식을 드시는 동안 방금 전까지 절을 하고 술을 따르던 집안의 남자들은 벌쭘한 시간을 보낸다. 어린 나에겐 그게 차례의 지겨움을 내려놓는 쉬는 시간 같았다. 교회를 다니시는 작은 아버지께서는 거실 한 구석에 가만히 서서 차례를 지켜보다가 쉬는 시간이면 안방에 갔다. 거기 하루 종일 제사음식을 만들던 여자들이 모여있었다. 어릴 적에도 한 번은 왜 여자들은 차례를 지내지 않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심각하게 한 고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 몇 년은 명절의 모든 행사에서 풍기는 비루함을 견딜 수 없었다. 집안의 어르신들이 제사상에 절을 드리고 나면 나와 동생, 사촌형이 절을 드렸다. 그때면 나의 아버지는 우리가 절할 때와 절하고 일어설 때를 일러주셨다. 문득 그게 너무 이상했다. 그래서 어느 명절에는 아버지께 내가 알아서 절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날 차례를 드릴 때는 사촌들이 머리를 숙이고 일어서는 때가 제각각이었다. 제각각이라는 점이 실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나는 뭔가 큰 일을 망친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후로 다시 아버지의 신호에 따라 절을 했다.


우습게도 이 부끄러움 때문에 명절이라는 억압을 자각했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설 전날에 전을 부치지 않음에도 명절 즈음에는 이상한 불쾌감에 휩싸이며 아버지께 대들었다. 불이 꺼진 거실에서 남자들이 차례를 지내는 동안 불이 훤한 부엌에 서있는 여자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괴리와 기묘한 긴장감을 견딜 수 없었다. 우리가 아주 유치한 놀이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내 세대가 오면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는 확신은 있다. 다만 아버지가 고집하는 차례에 훼방을 놓고 싶진 않다. 명절에 설거지를 도맡아 하거나 어머니의 하소연을 거드는 정도로 내 죄책감을 덜어놓는다. 조금은 무기력한 상태인 셈인데 비유하자면 차례상 뒤편에 놓인 병풍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병풍에는 한자도 아닌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가득 쓰여있다. 매년 그 병풍을 보았을 테지만 거기 문자의 뜻이 궁금했던 것은 최근 일이다. 병풍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무기력했다.


문득 세 가지 생각을 겹쳐본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는 영원한 미지에 산다는 것. 그리고 차례를 지낼 때마다 듣는 아버지의 기침소리를 생각해본다. 아버지와 다른 작은 아버지들과 나와 동생 사촌형이 함께 절을 할 때 우리는 땅에 얼굴을 가져다대느라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어느 때쯤 아버지가 마른 기침을 하시며 일어난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따라 일어서는 것이다. 십수 년 동안 아버지의 기침은 어떤 신호의 역할을 맡았다. 생각해보면 명절의 자질구레한 모든 행사와 규칙은 누군가의 기침소리에서 시작했을지 모른다. 나도 아버지의 습관 하나를 보탠 무수한 사람들의 습관을 받아들이며 내 여생을 살 것이다.


그래서 가족이, 한 사람이 단지 습관과 형식들의 덩어리일 뿐이라면 내가 마주 앉은 차례상이라는 형식이 실은 살아있는 나의 할아버지라고 생각해본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그 분을 나는 한 번쯤 만나본 셈 칠 수 있지 않을까.


글을 다 쓰고 나니 다시 두 가지 생각이 남아 덧붙인다. 차례상에는 돌아가신 분이 생전에 즐겨먹던 음식을 올리는 것이라던데 과연 나의 할아버지는 그 퍽퍽한 동그랑땡과 질긴 소고기를 좋아하셨을까. 한편으로 이 글이 참 가증스럽기도 하다. 뭔가 내가 명절 이데올로기를 옹호해버린 것만 같다. 어쩌면 여태껏 옹호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