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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아닌 Oct 14. 2021

일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Day 18

삼십여분 뿐이었다. 짧은 시간에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우리는 길가에 있던 카페로 들어갔다. 어느덧 테라스에 앉기에는 찬 바람이었으나 자리가 따로 없었다. 좁은 원형 테이블에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왼편으로는 도로가 가까웠고 이따금씩 커다란 트럭이 큰 소음을 내며 지나갔다. 그때마다 마주 앉은 이의 말소리를 듣기 위해서 몸을 기울여야 했다. 내 앞에는 어렵게 모신 선생님이 앉아있었다. 갑작스레 만든 자리였고 그분께 몇 가지 부탁과 그에 대한 승낙을 받아야 했다. 우리는 제안 배경을 찬찬히 설명했다. 이럴 때면 처음 일 분으로 상대방의 승낙여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대화에는 표정과 말투가 동원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속내는 금세 뉘앙스를 풍긴다. 


어쩌다 나온 이야기인 줄 모르겠다. 문득 선생님께서는 갈등을 햬결하려 하면 안된다는 말을 했다. 애초에 갈등은 해결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고 모든 게 깨끗해지는 상황은 환상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대신 갈등을 잘 관리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말하자면 갈등은 언제나 존재하므로 어떻게 갈등을 안고 함께 갈 것이냐를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조직 관리에 관한 이야기였으나 사실 선생님의 말씀은 다른 것들에도 붙여볼 수 있었다. 이를 테면 내가 우울을 대하는 방식과 비슷했다. 어떤 날의 우울은 이유가 없고 또 어떤 날의 우울을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면 우울을 이겨내거나 치료하려는 마음보다는 우울과 어떻게 함께 걸을지에 관한 고민이 필요했다.


다만 일에 관하여는 그러지 못했다. 어떤 프로젝트에 대해 그게 실패한 프로젝트라고 너무 쉽게 단정지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구성원 간에 갈등이 잦은 프로젝트가 그러했다. 더 나아질 기미가 없다고 느꼈다. 혹시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어쩌면 갈등 자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도리어 내 태도는 갈등을 지우고 덮어버리려는 모습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던 더 나은 선택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할수록 정상성에 대한 이미지가 무너진다. 예를 들어 성과라는 이미지, 건강한 공동체의 이미지, 원활한 소통이라는 이미지. 돌이켜보면 모두 환상 같다. 성과의 기준이 너무나 주관적이라는 것. 공동체의 실체가 따로 없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있다는 아주 오래된 착각들. 결국에는 믿을 게 없어지는 느낌이다. 염세주의 같은 것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이건 소박한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다. 일을 할 때 점점 기대가 줄어든다. 어쩌면 좋은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야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만큼하며 내 몫의 결과를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실은 이것만으로도 힘이 든다.


삼십분 간의 대화가 끝난 뒤에는 곧바로 다른 팀원의 집으로 갔다. 같은 프로젝트에서 일하는 동료였다. 그의 집이 마침 테라스가 있던 카페와 가까웠다. 오후에는 그와 화상회의가 약속되어 있었으나 서로 가까우니 그의 집에서 회의를 하기로 했다. 짙은 햇살이 창틀 모양으로 무늬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의 방에서 나는 책을 구경했다. 마치 도서관처럼 그는 온갖 책을 같은 주제끼리 묶어서 꽂아 두었다. 책을 살피다 보니 벌써 시간이 한참 흘러있었다.


이윽고 회의를 하다가 수다를 떨기를 번갈아 했다. 그러다가 나눈 이야기는 백신 접종에 관한 것이었다. 회사에서는 모든 사원이 접종을 받길 바랬으나 그는 접종을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백신 접종은 법정 의무가 아니었으므로 누군가 그에게 접종을 강요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영리조직에서 백신 접종에 관한 숙의 과정을 거치긴 어려웠다. 미묘한 갈등이 있었고 결국 그는 접종을 맞기로 했다. 나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내가 조직의 관리자였다면, 혹은 내가 접종을 받고 싶지 않은 당사자였다면. 어쩌면 모든 구성원이 동의할 수 있는 결론은 없을지 모른다. 더구나 회사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건강한 일터에 대한 고민이 오래 되었다. 오늘은 외부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걸어서 돌아왔다.


사무실에 가는 길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다. 그 옆을 따라 난 인도를 걷는 길이었다. 함께 걷던 이는 잠시 마스크를 내려보라고 했다. 젖은 풀냄새가 몸속 깊이 들어왔다. 그와 함께 하는 프로젝트에서는 몇 개의 영상물을 만들어야 했다. 그 중 하나는 일잘러가 주제였다. 우리 주변의 일잘러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콘텐츠였다. 나는 일잘이라는 말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대체 일잘이 뭐길래.


언젠가 나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어떤 지에 관해 질문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뻔한 말로 훌륭한 동료들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다고 같잖은 내 생각을 덧붙이는 것도 모두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찝찝한 뒷맛이 남았다. 그럴싸한 말로 치켜세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얼마나 공정한 사람이 되려고 말을 아낀 것일까. 


누가 누구를 일잘이라며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일까. 나는 일잘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칭찬을 듣더라도 괜히 기분이 나빠진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누군가에게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하지 않는다. 종종 동료에게 감사를 느끼거나, 또는 다른 이의 작업에 감탄하더라도 그걸 꼭 일을 잘한다고 표현할 필요는 없다. 대신 내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전하려고 한다. 이게 더 겸손한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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