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인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부재중 통화가 와 있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한밤중인 12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전화가 여러 차례 왔었다. 누군가 했더니 예전같이 유학을 했던 형에게 연락이 왔던 것이었다. SNS에 일본에 간 사진을 실시간으로 올리니 그것을 확인하고 연락이 왔던 것이다.
어젯밤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자니 피곤이 사라졌다. 일어나자마자 새벽에 있었던 애플 이벤트를 유튜브로 다시 봤다. 침대에 누워서 농땡이를 부리다 슬슬 배가 고파지자 밖으로 나갈 차비를 했다. 10시 반쯤 호텔 밖을 나갔다. 호텔에 나서기 전 직원에서 근처 맛집을 알아봤다. 항상 친절함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모습만은 마음에 든다.
오늘도 여기저기 계속 돌아다녔다. 하지만 9월 도쿄의 햇볕은 정말 뜨거웠다. 한국만 이번 여름 더운 줄 알았는데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아사쿠사 바로 옆에 있는 스미다 강 쪽으로 가 보았다. 예전 조금 힘들거나, 외로울 때 스미다 강으로 와 홀로 그 모든 것을 삭혔다. 다시 보니 반가웠지만 예전과 달리 너무 고요해 이렇다 할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지금의 내가 예전의 내가 아닌 것처럼 스미다 강 또한 예전과 같지 아니하였다.
오늘과 내일은 사람을 만나는 약속이 있어 미리 한국에 가져갈 선물을 샀다. 엄마에게 줄 선물과 회사 동료들에게 줄 선물을 샀다. 일본 특유의 좋은 선물을 사고 싶지만, 요즘에는 딱히 모두가 잘 알아 기본적인 선물이 좋은 것 같다. 선물을 사고 나니 이걸 들고 숙소까지 가는데 한참을 고생했다. 숙소에서 샤워를 한 후 약속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시절 인연
저녁 6시에 아사쿠사에서 유명한 카미나리몬 앞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도착해서 문자를 보냈고, 그 둘은 미리 나와 있었고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지만 예전 느낌 그대로였다. 살짝 살이 빠지긴 했지만 말이다. 그 둘은 내게도 예전과 똑같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예전부터 이미 늙은 얼굴을 갖고 있었다 라는 농담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가볍게 인사를 마치고 우린 근처 이자카야에 갔다. 무엇을 먹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곳의 음식은 모두 맛있었다. 게다가 직원이 너무 재미있고, 재치 있어 좋았다. 나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약간의 배를 채우고 우리는 슬슬 그동안 서로에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케다상은 사고로 수술을 하고 지금은 재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는 일을 할 수 없어 유리카의 벌이로만 산다고 하여 한편 마음이 찡했다. 유리카 또한 나처럼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40대를 넘어서 그런지 결혼에 대한 미련이 없다고 하였다.
유리카는 예전 나와 결혼까지 이야기가 오간 상대로 분명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유리카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우린 분명 결혼을 했을 것이다. 이런 우리 관계를 보면 피천득의 <인연>에서 피천득과 인연이 있는 아사코가 생각난다.
유리카와 함께 오랜만에 술잔을 부딪치며 이야기 주고받으니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그 당시도 오늘처럼 두 사람에게 항상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대접했다. 꽤 많은 돈이 나왔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더 좋은 곳에 갔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시간 남짓 이들과 함께 즐거운 식사를 가졌다. 12년 전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 같은데 실은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다. 푸릇푸릇한 30대의 첫 만남에서 이제는 어느덧 40대 중반의 중년이 되어 서로의 앞날을 걱정하는 두 사람과 지팡이를 들고 재활을 해야 하는 이케다를 보니 왠지 모르 안타까움이 들었다.
이번 일본 여행을 계획한 것도 이 둘과 만남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만나니 좋으면서 어딘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나는 그들과 만남으로 인해 12년 전의 추억여행을 하고 왔다.
둘을 먼저 보내고 술에 취한 듯 취하지 않은 듯 홀로 돌아가는 길
짧은 길속 기쁨과 슬픔이 길게 나누어져 미묘한 감정을유지한 채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그날의 내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