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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레씨 Mar 25. 2022

대구라는 이름의 공룡

 이십사년을 꼬박 대구에서 자란 덕분에 고향의 이런저런 얘기들에 무뎌졌지만, 바깥으로 나간 친구들이 밀물처럼 전해주는 소식들을 듣다 보면 대구가 과연 어떤 곳인가 한번 돌아보게 된다. 대구는 어떤 곳인가. 대구는 무엇으로 유명하고 무엇으로 먹고 사는 지역인가. 대구하면 사과, 섬유, 대프리카 등의 수식어가 먼저 떠오르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무색하다. 사과는 청송에서도 캘리포니아에서도 자라고 작년 여름은 경기도를 비롯한 수도권 전역이 대구의 더위를 뛰어넘었다. 분지도시인 대구는 온통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데, 나와 내 친구들은 사과도 섬유도 모르겠고 그냥 더워죽겠고 답답하다는 말을 에둘러서 한다. 대놓고 내 고향을 깎아내리는건 어쩐지 심술궂게 비뚤어진 노파의 입술같은 행동일 것 같고, 그래서 나는 그냥 좀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면 건너편에 앉은 내 친구도 맞아 대구가 좀 그렇지. 라고 대답해준다.


 이미 충분한 사람들이 떠들고 외치는 정치 얘기를 하자는건 아니고, 내가 이렇게 투덜거리는 이유는 다름아닌 페퍼로니 피자 때문이다. 뜬금없이 페퍼로니 피자 얘기를 왜 하냐고? 대구에는 스타일 비건이 없다. 그래서 대구에는 비건 페퍼로니 피자가 없다. 대구에는 오설록 오프라인 매장도 없다. 대구에는, 대구에는, 대구에는. 어른들은 나더러 대구에서 쭉 지낼거면 많은 것들을 포기하라고 말하면서도 내가 노골적인 실망감을 드러내면 말을 얄밉게 바꾼다. 그래도 다른데 나가 지내 살아보면 또 여기만큼 편한 곳이 없다. 네가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그런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나는 또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나처럼 불만을 먹고 자란 어린이들이 하나 둘 입간판을 내걸기 시작했나보다. 요즘에는 찻집도 생기고 책방도 생기고 채식 식당도 하나둘씩 생기고 있다. 이제 나는 기후재앙 뉴스를 보면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더커먼으로 갈 수 있다. 가서 귀리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시키고 콩으로 만든 튀김을 시키고 고기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커리를 먹을 수 있다.


 이 좁고 더디지만 정겨운 도시에 염증을 느낄때면 더폴락이나 차방책방으로 가서 책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럼 나는 아늑한 나의 도시에 머무르는 채로 내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다. 바깥의 냄새를 달고 들어오거나 안에서부터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에 동참한 사람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대구라는 이름의 공룡은 그렇게 육중한 발걸음을 쿵쿵 내딛는다. 공룡은 시간을 먹을수록 늙어가기는 커녕 젊어지는 것 같다. 그런 공룡의 힘겨운 발걸음을 바라보다 보면 나의 도시 대구를 미워하는만큼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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