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 전 현미의 어머니는 범룡 씨에게 기계 몇 대 사 줄 테니 직접 운영해 보라고 했다. 아무래도 오래 못 살 것 같아 죽으면 현미의 오빠나 언니들이 분명 욕심을 낼 것이니 죽기 전에 재산분배를 직접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범룡 씨는 장모님이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리 없다며 일을 좀 더 배우겠다고 망설였다. 처갓집 신세 지지 않고 스스로 살려고 했던 범룡 씨는 장모님의 제안을 넙죽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 둘 키우기에는 범룡 씨의 성실함이 역부족이었다. 여공 두 명 하숙을 치며 생활비를 보태는 현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처갓집 신세 졌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범룡 씨를 현미가 설득했다. 공장을 차리면 자기도 돕겠다고 했다. 공장 이래야 기계 몇 대 두고 가동할 정도이니 경력 있는 여공 두세 명 구해서 같이 해보자고 했다. 현미는 범룡 씨가 형부의 공장에서 머슴처럼 부려지는 게 싫었다. 그 정도로 열심히 하면 공장을 직접 운영해도 성공할 것 같았다. 겨우 두 사람의 합의점을 찾고 장모님을 뵈러 가기로 한날 새벽에 전화벨이 잠을 깨웠다. 새벽에 들려오는 전화벨소리는 좋지 않은 일이 훨씬 더 많다는 걸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특히 나이 드신 부모가 따로 계실 때는 더욱 그렇다. 현미는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범룡 씨도 일어나 현미를 쳐다보았다.
"뭐라고요? 엄마가 어쨌다고요?"
범룡 씨를 쳐다보던 현미는 전화기를 든 손을 떨고 있었다. 범룡 씨가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여보세요? 큰 처남댁?"
현미의 큰 올케였다. 저녁을 잘 드시고 주무신 어머님이 정신을 놓으셨다며 훌쩍였다. 강자를 깨워 아침 좀 챙겨 먹고 출근하라고 말하고 엄마집으로 달려갔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엄마가 애지중지하던 목련 나무에 매달려있던 마른 잎 하나가 현미의 머리에 사뿐히 떨어졌다. 왕진가방을 든 의사가 막 현관문을 나오고 안에서는 곡소리가 났다.
삼우제를 지내고 형제들이 재산분배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오롯이 형제들만 이야기하기로 했다. 현미는 문식이 문희를 범룡 씨에게 맡기고 방으로 들어왔다.
곡물 유통을 하는 큰오빠, 00 산업 이사장 부인 큰언니, 00 섬유 대표 부인 둘째 언니, **공업사 대표 부인 셋째 언니, 법무사 둘째 오빠, 대기업과장 셋째 오빠, 대형요식업사장 넷째 언니, 대단지 아파트 독점 슈퍼마켓 사장부인 다섯째 언니, 그리고 현미까지 9남매가 한자리에 모였다. 현미와 눈이 마주친 셋째 오빠가 쯧쯧 하며 클 때도 제멋대로 더니 꼴좋다며 빈정 거렸다. 엄마가 계실 때는 대놓고 현미를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 없이 늙은 엄마손에 자란다고 엄마가 현미를 감싸고돌았기 때문이다. 큰오빠가 셋째 오빠와 현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그동안 건강하셔서 이렇게 빨리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애석하지만 마무리를 해야겠구나. 어머니 앞으로 있는 재산이 꽤나되는구나, 홀로 우리를 키우며 이 정도로 재산을 형성하신 어머니가 자랑스럽다. 어머니가 아픈 손가락으로 여기던 우리 막내 현미의 생활이 궁핍하고 또 어머니가 김서방에게 공장을 차려줄 생각을 하셨던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내 생각인데 어머니 재산을 정리해서 김서방에게 기계 몇 대 있는 공장을 차려주고 나머지를 나누었으면 하는데 동생들 생각은 어떠한지?"
서로 눈치만 보는 형제들을 둘러보며 잠시 말을 멈춘 큰오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 동의하면..."
그 순간 큰언니가 큰오빠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안 돼요!"
모두의 눈이 큰언니를 쳐다보았다.
"김서방은 공장을 운영할 재목도 안되고요. 또 현미가 김서방과 결혼할 때 어머니 재산은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장담했어요. 밥은 안 먹고 사랑만 먹으면 사는 아이니까 저대로 살게 내버려 둬요. 돈으로 사랑을 살 수는 있어도 사랑이 돈을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아야 돼요. 그때 지형부가 중매한 사람은 지금 사업이 커서 동대문시장을 주무르고 있대요. 그렇게 사업가 기질이 있는 사람 차버리고 어디서 버스기사하고 눈이 맞아가지고... 지금 김서방 공장 차려주어 봐야 얼마못가서 다 말아먹을걸요. 공장운영이 차리기만 하면 누구나 다 할 정도로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다른 사람 다해도 김서방은 절대 못해요. 순하고 착하기만 했지 야무진 구석이 있어야지요? 엄마가 어떻게 모으고 지킨 재산인데 말아먹을 거 불을 보듯 뻔한 그런 짓을 해요? 김서방 공장 차려주는 것은 절대반대예요. 현미도 지가 선택한 삶이니까 불쌍해할 것 없어요."
큰언니는 현미의 눈을 피해 다른 형제들을 둘러보며 동조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식당 하는 넷째 언니, 슈퍼 하는 다섯째 언니도 자기들도 여기까지 허리띠 졸라매고 잠자는 시간 줄여가며 일구었는데 막내만 갑자기 앉아서 엄마의 재산을 받아가는 것은 반대라며 목소리를 냈고, 셋째 오빠도 그동안 제멋대로 살았으니 앞으로도 알아서 살게 내버려 두라고 큰 형님의 말에 반대라고 나섰다.
현미는 부모처럼 믿었던 언니오빠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게다가 결혼 전부터 이어지던 남편에 대한 무시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언니오빠들을 참을 수 없었다. 공장장이라는 명함 한 장 찍어주고 막일꾼처럼 부려먹던 큰 형부에게도 서운했다. 큰 언니의 생각이 곧 큰 형부의 생각일 것이다. 현미는 박차고 일어섰다.
"그래요. 그까짓 돈 다 필요 없어요. 공장도 문식아빠가 차려달라고 말한 적 없어요. 엄마가 언니오빠들에게 해준 것처럼 제 몫을 그런 식으로 주시려고 했던 거잖아요? 문식아빠가 왜 사업가의 재목이 안 돼요? 형부처럼 가난한 시골처녀들 데려다가 임금착취하며 부려먹을 능력이 안 돼서 그러나요? 공장여공들 힘들어할 때 간식거리 사주며 다독여 주어서 그런가요? 이사하고 일거리 많을 때 도와달라며, 일 배워서 사업 하라며 꼬셔다가 잡부처럼 부려먹었잖아요? 이제 와서 공장 차려주려니까 재목이 안된다고요? 왜요? 언니몫이 줄어들어서 그러나요? 형부 거래처 다 뺏어올까 봐 그러나요? 아! 동대문 그 사람? 형부가 맘 놓고 자기 물건 납품해야 하는데 다른 공장에 빼앗겨서 그러는 거군요. 형부는 거래처에도 소문났다면서요? 자재값은 미루고, 깎아먹고, 어음발행하고, 자기 수금은 매일 쫓아가서 받아오고, 여공들 월급도 업계에서 제일 적게 주고, 한 달씩 깔아놓고, 그만두면 두세 달 쫓아와야 겨우 기본급 정산해 주고, 악덕업주라고 업계에 소문 다 난 거 제가 모를 줄 아세요? 그런 남편이랑 사는 게 그리도 자랑스러우세요? 제 남편이 인간적이고 사람 좋은 게 돈 없다고 무시당할 이유인가요? 그동안 엄마가 막내사위를 얼마나 믿고 의지했는지 아세요? 언니오빠들은 엄마한테서 무엇이라도 받아내려고 거짓효도를 했지만 문식아빠는 엄마를 언니오빠들보다 더 챙겨드렸다고요. 그게 돈바라고 한 것 같으세요? 그 사람 성품이 원래 그래요. 어려서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엄마를 챙긴 거라고요. 그래서 사업가 자질이 안된다면 사업가들은 모두 거짓 효도를 하고, 남을 등쳐먹고, 돈만 아는 사람이어야 하냐고요?"
현미는 서운했던 감정들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나오는 대로 퍼부었다. 누군가 -언니한테 뭐 하는 짓이야?-라며 소리를 질렀고 큰언니는 얼굴이 퍼렇게 질려서 입을 벌벌 떨고 있었다. 현미는 주저앉아 흐느꼈다. 그때 문식이가 방문을 열고 -엄마!-하고 불렀다. 범룡 씨가 시켰을 것이다. 현미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문식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언니오빠들을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오늘부터 저는 언니오빠들 없는 사람으로 살겠어요. 언니오빠들이 가난하다고 무시하는 애들 아빠랑 보란 듯이 살 거니까요? 잘 먹고 잘들 사세요"
-다음은 월요일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