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버스회사에 안내양의 조건을 물으러 갔던 날, 중졸이상만 뽑는다는 말을 듣고 양희는 크게 실망해 있었다. 다음날 공장장님은 버스회사 관계자를 만나 양희의 취직을 부탁했다. 전에 기사로 있을 때 자타공인 성실하기로 인정받던 기사여서 회사에서도 공장장님이 처음 하는 부탁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인사담당은 이력서에 적당히 중졸이라 적고 신원보증서에 김범룡 씨의 도장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공장장님은 흔쾌히 양희를 믿고 도장을 찍어주었다. 졸업증명서 같은 것은 받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다지만 시골 뜨기 가난한 양희를 믿어준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취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숙사로 옮기기 위해 짐을 챙기던 날 공장장님은 사모님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몇 가지 아버지 같은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일이 위험하니까 항상 문손잡이 꼭 잡고 정신바짝 차려야 된다. 기사와 사인이 안 맞으면 사고 나기 십상이니까 기사의 표정과 말에 신경 쓰고, 그리고 기사가 은근히 횡포를 부릴 때가 있어 삥땅 달라고, 그럴 때는 그냥 모른척하면 돼, 모두에게 정직하면 기사들도 나중에는 그러다 말 거니까, 물론 네 주머니에도 부정한 돈은 남겨두지 않아야 돼, 남의돈 슬쩍해서 부자로 잘 사는 사람 없다. 괜히 허영심만 커져서 삶이 황폐해지기만 한단다. 처음 에는 몇 푼 생겨서 넉넉한 듯해도 돈은 생기는 것만큼 쓰게 돼있어, 씀씀이가 커지면 아무리 벌어도 부족한 게 돈이야, 처음부터 땀 흘려 번돈이 아니면 가치 있게 돈구실을 못해, 제일 걱정되는 게 그 부분이다. 너를 믿으니까 너의 신원을 보증해 준 것이니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그곳은 여기보다 월급이 두 배는 될 것이니 다른 욕심은 내지 마라. 아버지 빚 다 갚으면 그만두고 다시 왔으면 좋겠지만 안내양 한번 발들이면 쉽게 빼지 못하더라. 내 말 새겨듣고 건강하게 돈 모아서 좋은데 시집갔으면 좋겠다 "
대략 그런 말을 했었다. 지나고 보니 지금 양희가 안내양으로 적응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공장장님의 당부를 모두 잊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안내양 다워졌다는 말에 양희는 오랜만에 화끈거렸다. 그래도 다시는 기사들에게 구박받고, 정산실 임원에게 욕먹고, 사감실에서 가운을 벗어야 하는 일은 당하고 싶지 않다.
버스가 구로동에 섰다. 몇 명이 내리고 다시 몇 명이 탔다. 양희는 내려서서 내리는 승객들의 요금을 받고, 타려는 승객들이 다 탄 것 같아 큰소리로 오라이를 외치며 버스 옆구리를 -탕탕- 두드렸다. 그때 보따리를 든 할머니가 나도 좀 태워달라며 뒤뚱거리며 뛰어왔다. 기사는 양희의 사인에 버스를 서서히 출발시키고 있었다. 양희는 다시 버스 옆구리를 -탕- 치면서 스톱을 위 쳤다. 막 구르던 버스의 바퀴가 멈추었다. 양희는 할머니의 보따리를 받아 들고 할머니를 먼저태우고 자리에 앉는 것을 본 다음에 출발신호를 다시 보냈다. 보따리를 할머니자리로 갖다 드리니 할머니는 양희의 손을 잡고 고맙다고 몇 번을 말한다. 그런 양희를 공장장님은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보기 좋네, 양희가 심성이 착한 줄은 알았지만 직접 보니까 기분이 좋아"
그 말에 할머니는 이렇게 착한 안내양은 처음 보았다며 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은 양희가 신입일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보따리를 들고 뛰어오는 할머니를 태우려 하자 기사가 화를 냈었다. -저런 할머니 태웠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네가 책임 질 거냐?- 서슬이 퍼렇게 씩씩대는 기사가 무서워 손짓하는 할머니를 외면했던 그 일이 양희의 가슴속에서 지워지지를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양희가 서라면 서고 가라면 간다. 공장장님은 그런 분위기를 보고 양희가 이미 자신의 당부를 다 잊었음을 눈치챈 듯했다.
공장장님은 영등포 역에서 내렸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수고하라며 등을 토닥이고 내린 공장장님은 양희를 돌아보지 않았다. 양희는 공장장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것처럼 차순이는 차순이의 법에 따르는 게 생존 법칙이야, 공장장님처럼 정직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보았을 뿐이고, 난 그 방법대로 살고 있을 뿐이야-
그리고 다시 1년이 흘렀다. 양희의 안내양 생활 3년 차이다. 서울대를 돌아 종점으로 가는 중에 대방역 정류장으로 좌회전할 때 직진 신호를 받고 서있는 64번 좌석버스의 기사가 눈에 익었다. 다 시쳐다 보니 김범룡 씨였다. -공장생활 힘들어하더니 버스로 다시 왔나?- 번듯한 직함에 사장의 동서라는 위치가 남의 옷 빌려 입은 듯하다며 불편해했었다. 비번날 가면 따끈한 새 밥을 지어주시던 현미 사모님이 갑자기 보고 싶었다. 작년 양희차에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던 공장장님이 서운해서 그동안 찾아가지 않았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비번날에 양희는 현미사모님을 찾아갔다.열린대문을 들어서니 항상 깔끔하던 마당이 어수선했다. 양희의 마음에 찝찝한 기운이 돌았다. 봄이면 화단을 정리하여 푸릇푸릇한 새싹을 키우던 사모님이었는데 화단도 마당도 한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 같았다. 수도가에 엎어진 대야를 바로 놓고 쏟아져 말라버린 비누를 주워 비누그릇에 담아 대야 속으로 넣어놓고 현관문을 두드렸다. 아이가 뛰어나왔다.-이모!-여섯 살 문식이가문을 열고 동생문희가 뒤따라 나왔다.
"문식아!문희야!잘 있었어? 엄마는?"
문식이얼굴은 얼룩이 져 있었고문희의묶은머리는다 빠져나와 얼굴에 아무렇게나 붙어있었다. 양희는 철렁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그렇게 깔끔하던 사모님이 아이들을 이렇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아이들이열고 나온 방 안으로 누워있는 사모님이 보였다. 기척을 들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누가 오셨니?- 힘겨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응,양희 이모 왔어"
문식이가 동생을 챙기며 내가 사모님을 볼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 앉았다.
양희는 방으로 들어갔다. 쿰쿰한 냄새가 났다. 사모님의 머리맡에 약봉지와 물주전자가 놓여있었다.
"왜 이래요?왜 이러고 있어요?"
양희의 목소리는 젖어들었다.사모님은 일어나려 애를 썼고문식이문희는 고사리 손으로 엄마를 부축하려 했다. 양희가 얼른 다가가 등을 받쳐 일으켜 주었다. 힘없이 눈시울이 축축해진 사모님이 양희의 손을 잡았다.
"양희 왔구나,밥은먹었니?"
더듬거리는 몇 마디에도침을흘리고 힘겨워 보였다.그런 상황에도 양희 밥을 걱정하고 있다.
"이모! 엄마 아퍼"
엄마의 어둔한 말투와 침흘리는 모습을 바라보던 문식이 울음을 참으려 애를 쓰다가 양희 품에 안기며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문희도 오빠를 따라 울며 양희에게 안겼다. 어린것들이 아픈 엄마가 힘이 들까 봐 내색도 못하고 엄마품에 안기지도 못하고사람 품이 얼마나 그리웠으면양희에게 기대고울음을 터트릴까 생각하니양희도 눈물이 났다.
-다음은 목요일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