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양희는 월급날이면 절반은 시골로 보내고 절반은 적금을 넣었다. 양희는 대타근무도 많이 해서 월급도 안내양 중에서는 적지 않았고 일 끝나고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고 온 돈도 차곡차고 모아서 금방 돈이 모여질 것 같았다. 2년만 더 일해서 목표한 금액 500 만원만 모으면 정기예금을 넣어 이자로 용돈 쓰며 중학교 과정 검정고시 학원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돈이 생각처럼 쉽게 모여지지 않았다. 급여가 올라 월급이 40 만원 정도가 되었다. 급여가 오르는 만큼 다른 모든 물가도 올랐다. 양희는 생존에 필요한 것들만 사니 물가가 올라도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기숙사비 2만 원 오른 것 말고는 양희의 지출은 더 많아지지 않았다. 어쩌면 양희의 목표액을 채울 날이 더 짧아질지도 몰랐다.
어느 날이었다. 소영이와 같은 날 비번이었는데 외출했다 일찍 돌아온 소영이가 훌쩍였다. 방바닥에 엎드려 책을 보던 양희는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소영이를 쳐다보았다.
"엄마가 수술해야 된대"
그 말을 하고 눈물을 주르륵 떨구었다. 소영이 엄마의 수술이라는 말보다 소영이 눈물에 양희는 마음이 찡했다.
"왜? 엄마가 어디 아프셔?"
"응, 암 이래 위암, 초기라서 수술만 하면 나을 수도 있다는데, 울 엄마 돌아가시면 어쩌니? 수술비가 너무 많아"
양희는 암이라는 단어에 철렁했다. 암 걸렸다가 나았다는 사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소영이의 엄마도 양희 엄마랑 나이가 비슷한 이제 40대 중반인데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말에 양희는 울컥했다. 소영이 부모는 전라도 산골에서 소작을 얻어 농사를 짓고 산나물을 캐어 장날 내다 파는 것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가는 듯 보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오빠는 작은 공장에 다니는데 자기 월급으로 자기 혼자도 못살아서 소영에게 매달 찾아와 얼마씩 빌려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오빠를 믿을 수도 없고 공부하는 동생들 학비도 걱정이 될 소영이가 너무 안쓰러웠다. 어쩌냐고 위로를 하는 양희에게 소영이는 울면서 애원했다.
"내가 꼭 갚을 테니까 나 돈 좀 빌려줘 엄마 수술비 꼭 해주고 싶어, 한꺼번에는 못 갚을 거니까 매달 월급 타서 20 만원씩 갚을게 되는대로 나 좀 빌려줘, 양희야 도와줘"
양희는 난감했다. 몇 푼 그냥 주는 건 몰라도 꼭 받아야 하는 목돈을 줄 수는 없었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악착같이 절약하며 모은 돈을 목돈으로 빌려주기가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가 빌려주지 않아서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으면 소영이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소영이를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던 양희는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 선뜻 대답도 하지 못하고 거절도 못했다.
양희는 입출금 통장을 보았다. 그야말로 티끌을 모아둔 통장이다. 입금 기록만 있고 출금 기록은 없다. 먹기만 하고 배설은 하지 않는다는 전설의 동물 비휴가 배탈이라도 났나 싶었다. 적금 깬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입출금 통장까지 비우게 되었다. 양희는 남의돈 슬쩍해 봐야 자기돈 안 되는 거라던 김범룡 씨의 말을 생각하며 실소했다. 통장에 찍힌 금액은 120 만원이었다. 매달 20 만원씩 갚는다 했으니 곧 채워질 거라 생각하며 통장을 들고 은행으로 갔다.
소영이는 엄마를 간호한다며 10일간휴가를 낸다고 했다. 양희손을 잡고 고맙다고 울먹이는 소영이가 짠해서음료수라도 사 먹으라고 만 원짜리 지폐도 한 장 쥐어주었다. 그렇게 떠난 소영이가 한 달이 다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나 걱정이 되어 윤사감에게 물어보고 양희는 주저앉고 말았다.
"무슨 소리야? 소영이 휴가가 아니고 사표 내고 갔는데, 지금 쯤은 다른 데서 수습 끝나고 정식 근무 하고 있지 않겠니?"
"그런데 소영이 사물함은 왜 계속 잠겨있어요?"
"그래? 짐도 다 가져갔는데. 왜 잠겨있을까?"
룸메들이 모두 근무에 들어간날 소영이는 자기 사물함의 물품을 모두 챙겨갔다고 했다. 윤사감과 함께 방으로 왔다. 소영이 사물함에 걸려있는 자물쇠를 건드리자 그냥 열렸다. 마치 잠근 듯 자물쇠를 눌러만 놓은 것인데 주인 있는 사물함이니 당연히 잠겨있다고 여긴 것이다. 양희 외에 4명의 안내양들도 소영이가 그만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같은 방 식구들만 감쪽같이 속인 것이었다. 자물쇠를 빼고 열어보니 열쇠와 메모지 한 장이 있었다. -양희야 미안해 돈이 급하게 필요해서 거짓말했어, 엄마는 위궤양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돈은 꼭 벌어서 갚을게- 믿는 도끼가 발등 찍는다더니 친구를 잃지 않으려 빌려준 돈이 친구마저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시골집에 명절에도 안 가고 안 쓰고 모은 돈이었다. 아버지가 10 만원만 더 달라고 해도 없다고 드리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면 검정고시 학원에 가고, 대학도 가고 싶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 다 참으며 모은 돈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