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째, 반편성을 하며 느낀 점
학부모님의 번호가 핸드폰 액정에 뜨면 가슴이 콩닥거린다. 찰나의 순간 액정에 뜬 아이의 보호자가 담임에게 전화할 만한 일이 A에게 있었던가 생각해 본다. 한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A의 어머니는 진급 반 편성에서 담임교사가 고려해줬으면 하는 점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아주 자세하게 말씀하셨다. 긴 이야기의 결론은 A는 절대로 네 명의 아이와 같은 반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진급할 학년의 학급은 총 일곱 반인데, 네 명과 떨어져야 한다면 A가 갈 수 있는 반은 세 반이 남는다. 네 명의 아이와 같은 반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아이들의 성향이 A와 맞지 않기 때문이라 하셨다. 성향이 너무 다르니 A가 학업을 이어감에 방해를 받는 다며 불만 아닌 불만을 토로하셨다. A어머니의 긴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한마디 했다.
"어머님 말씀을 고려하겠지만 학교폭력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이상 반을 분리조치 하기는 어렵습니다."라고.
전화통화를 끝내고 잠시 후, 띠리리 핸드폰 문자 알림이 울린다. B의 아버님이시다.
"선생님, 우리 B가 C 때문에 올 한 해 참 힘들었습니다. C와 내년에는 같은 반이 안 되면 좋겠습니다."
"아버님, 이유가 뭘까요?"
"이유가 있었야만 됩니까?B는 C가 그냥 싫다는데요."
사실 B 아버님의 말씀은 맞는 말이다. 사람이 싫은데 이유가 있겠는가. 그냥 싫은 거지. 하지만 싫다는 이유로 같은 반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나도 싫은 사람, 눈에 가시 같은 사람 투성이지만 그냥 견디며 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B의 아버님에게 문자를 남겼다.
"아버님 말씀을 고려하겠지만, 학교폭력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이상 반을 분리조치 하기는 어렵습니다."라고.
그 후로도 반편성과 관련된 전화와 문자는 몇 차례 더 있었다.
반편성과 관련된 보호자의 전화를 처음 받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해 봤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 것 같다. 2019년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쌓인 앙금이 아직 남아있는데 삼 년이 지난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그러니 진급 반편성에서, D와 같은 반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학교폭력이 사화문제로 대두되었으니 그럴만한 문제라 생각하고 고려해서 반배정을 했다. 그 해를 기점으로 매년 학년말에는 의례적으로 반편성에 대한 민원이 있다. 이제는 당연히 한 반에 몇 건씩은 반편성에 대한 민원이 존재한다. 한 학급 인원을 30명이라 가정했을 때, 대략 5건 정도 있는 것 같다.
종례를 마치고 학급 담임들이 한 자리에 모여 반편성 회의를 가졌다. 몇 차례에 걸쳐 장고의 회의를 진행하니 모두들 녹초가 되었다. 진급 반편성 업무는 교사들에게 꽤나 어려운 과제다.
학창 시절 나는 40명 정도 되는 아이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중에는 그냥 싫은 아이, 꼴도 보기 싫은 아이, 가까이 오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의 존재가 되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울려 지내면서 천천히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선에 대해 배웠던 것 같다. 태생적으로 사회성 지수가 지극히 낮은 나는 학창 시절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인간관계의 정석을 터득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마음에 맞는 사람하고만 지낼 수 없는 것이 현실인데 자신과 맞지 않으면 회피하려 하니 이들의 앞날이 걱정된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낼 수는 없어도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야 하는 것이 인간관계인데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안타깝다.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니 말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권리만 강조하는 분위기가 농후해졌다. 반편성도 마찬가지다. 우리 아이가 행복하게 살 권리, 편안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는데 이 권리가 침해되는 걸 참지 못한다. 아이의 권리를 찾기 위해 반편성에 대한 요구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권리 말고도 책임과 의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개인의 권리 못지않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도 중요하다. 타인과 적당히 협력하고 혹시 있을 불편하고 부당한 일에 맞설 수 있는 용기가 공동체 구성원이라면 갖추어야 할 모습이다.
개인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마음에 맞지 않는 타인과도 함께 살아가는 능력을 자연스레 터득해야 험난한 사회에서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사인 나도 두 아이의 엄마인지라 집에서 아이들의 학교생활 이야기를 듣는다. 특히 딸아이는 TMI 넘치는 학교생활 이야기를 아주 리얼하게 들려준다. 최근에는 문구점에서 '반 배정 대박 부적'을 사 와서 제발 E랑 같은 반 되지 않게 해 달라는 소원을 부적 뒷면에 간절히 적고 있었다. 리얼한 학교생활 이야기를 들은지라 오죽하면 반배정 대박 부적까지 사 왔을까 싶어 E랑 같은 반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은 복잡하고 머리로는 담임 선생님께 전화해 볼까 고민했지만 "마음에 드는 친구랑만 지낼 수 없는 법이고, 어디 가나 너와 맞지 않는 친구는 존재한다."고 말했다. 학교폭력의 피해를 받았다면 상황은 달라지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런 사람과도 저런 사람과도 모두 어울려 보는 것이 아이의 앞날을 더 빛나게 해 주리라 생각했다.
모두가 같은 반이 되기 싫어하는 누군가도 어느 반에는 소속되어야 한다. 반편성을 할 때마다 이 아이들이 눈에 띄고 신경 쓰인다. 누구도 함께 하길 원하지 않지만 이들의 학교생활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걸 세세하게 고려하여 며칠에 걸쳐 반편성을 했으나 분명 누군가는 반 배정 발표 날 눈물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멀리 본다면 '반 배정 대박 부적' 없이도 행복한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반 배정 대박 부적'의 힘이 아니라, 단단한 내면의 힘을 길러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와의 힘든 시련을 이겨내길 응원한다. 우리 아이들 뿐 아니라 우리 반 아이들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이 어느 반에 배정받더라도 반편성의 꿀맛을 느끼며 행복한 학교생활을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