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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석 Apr 06. 2023

베이브 루스는 어떻게 <바빌론>의 땅으로 왔을까

메이저리그, 서부를 발견하다

혹시 얼마 전에 개봉한 <바빌론>이란 영화를 보셨나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대, 갓 영화 산업이 자라기 시작한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영화 산업에서 성공을 꿈꾸는 인간군상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 20년대 미국은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측면에서 폭발했고 또 혼란스러웠던 시대였죠. 야구도 예외는 아니었는데요, GOAT 베이브 루스의 전성기가 바로 20년대였습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야구는 미국의 국민 스포츠(National Pastime)가 됐습니다.


영화 <바빌론> 티저 예고편


오늘 이야기는 <바빌론>의 땅, 황량한 할리우드 벌판에 어떻게 베이브 루스가 걸어 들어오게 되었는지입니다.




프로스포츠 불모지, 서부

지금은 메이저리그에 30개 구단이 있지만, 한동안은 16개뿐이었습니다. 1901년부터 1961년까지 무려 60년 동안이요. 16개 구단은 모두 미시시피 강 동쪽에 있었습니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가까운 구단은 세인트루이스에 있던 카디널스였어요. 동쪽에 몰려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스포츠 산업을 위해 필요한 건 관중이 될 인구와 선수를 원정경기로 실어 나를 교통망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가 모두 북동부에 유리했어요. 미국은 북동부에 유럽 이민자가 정착하며 발전하기 시작한 국가이기에 인구가 그곳에 몰린 건 당연했고, 야구 리그가 형성된 1800년대 후반 철도와 도로 교통망이 잘 개설된 곳도 북동부였죠.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Major League Baseball relocations of 1950s–1960s


물론 서부와 남부에도 대도시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동부에서 거리가 너무 먼데다 교통수단도 지금보다는 부실해서 연고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메이저리그는 1년에 154경기를 치르는 빡빡한 일정이었어요. 하루 정도 휴식일 안에 긴 거리를 가는 건 시간으로나 체력으로나 부담이었습니다. 현지 주민은 하는 수 없이 마이너리그나 지역 리그를 구경해야 했어요. 야구만 그런 게 아니어서 미식축구, 농구, 아이스하키까지 모두 연고지가 특정 지역에 몰리는 문제 아닌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오랫동안 NHL을 구성했던 6개 구단 중 가장 서쪽에 있던 구단이 시카고 블랙호크스였으니까요.


하지만 <바빌론>의 시대를 거치며 계기가 마련됩니다. 영화와 카지노 같은 신산업이 흥성하고, 이민자도 유입되면서 자본이 몰리고 인구가 늘었죠. 교통수단 문제도 1940년대 말부터 해결됐습니다. 제트기를 이용한 정기 민항기가 취항한 거죠. 그러면서 긴 거리를 전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됐습니다. 마침내 프로스포츠가 들어올 터전이 마련된 거죠. 첫 삽은 미식축구가 떴습니다. 46년 클리블랜드 램스가 로스앤젤레스로 옮겼고, 샌프란시스코에 포티나이너스가 창단됐습니다. 50년대가 되어 메이저리그가 두 번째로 삽을 들고 새 시장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최초의 상업용 제트기, 드하빌랜드 DH106 코멧. 출처: BAE Systems


첫 시도는 보스턴에서 일어났습니다. 1953년, 레드삭스에 밀려 흥행 부진을 면치 못하던 브레이브스는 새 구단주의 주도로 연고지를 중부 밀워키로 이전합니다. 명예의 전당 투수 워렌 스판 등을 앞세운 브레이브스는 호성적과 동시에 180만 관중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해요. 여기에 자극받은 두 구단이 줄지어 연고지를 옮깁니다. 54년에는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가 동부 볼티모어로 떠나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됐고, 55년에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가 중부 캔자스시티로 옮겨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가 됩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도시 내 경쟁에서 밀려 연고지를 옮겼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다만 이 세 건은 '서부'로 옮겼다고 보긴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초대형 사건이 뉴욕에서 터집니다.


뉴욕 세 구단의 흥망성쇠

1903년부터 1957년까지 뉴욕에는 3개 구단이 있었습니다. 양키스, 자이언츠, 다저스. 출처: sportslogos.net


뉴욕에는 수십 년 간 양키스, 자이언츠, 다저스 세 구단이 공존해 왔습니다. 1950년대 중반 뉴욕의 주인은 명실상부 양키스였습니다. 20년대 초까지는 자이언츠가 앞서나갔지만, 20년 양키스가 베이브 루스를 영입하면서 야금야금 1등을 빼앗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루 게릭과 조 디마지오 같은 스타가 끊임없이 나왔고 성적도 하늘을 찔렀습니다. 30년대 말에 월드시리즈 4연패, 50년대 초에 5연패를 이룩했어요. 거의 80~90년대 해태 타이거즈에 비견할 만한 독주였습니다.


반면 자이언츠는 영광과 거리가 점점 멀어졌습니다. 1930년대 중반 세 번 월드시리즈에 나가 한 번 우승했지만 양키스에게 나머지 두 번을 졌고요, 윌리 메이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어두운 시기를 보냅니다. 덕분에 54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두는 등 성적은 그럭저럭 나왔습니다. 51년에는 다저스에 13게임 반을 뒤져 있다가 따라잡고, 끝내기 홈런으로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기적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관중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어요. 그 다저스가 강호로 부상했기 때문입니다.


1951년, 자이언츠의 내셔널리그 우승을 이끈 바비 톰슨의 끝내기 홈런


다저스는 오랫동안 다른 두 구단에 비해 사정이 별로였습니다. 성적도 관중 수도 내세울 게 안 됐고, 충성스러운 저소득층 팬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대신 ‘추레한 아저씨(The Dem Bums)’라는 이미지가 있었어요. 1930년대까지 월드시리즈에 딱 두 번 나갔는데 그나마 우승도 못 했습니다. 하지만 30년대 말 래리 맥페일과 브랜치 리키라는 유능한 단장이 등장하면서 운명이 바뀝니다. 리오 듀로셔와 월터 앨스턴이라는 명감독도 있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최초의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이 데뷔한 곳이 다저스입니다.


다저스는 1941년부터 딴사람이 됐습니다. 그해 100승을 거두며 월드시리즈에 올랐고, 제2차 세계대전기 잠시 숨을 고르다 47년부터 질주를 시작합니다. 재키 로빈슨, 명포수 로이 캠퍼넬라를 포함해 명예의 전당 선수가 5명이 나왔고요. 꾸준히 100만 관중을 유치했습니다. 하지만 월드시리즈에 올라가는 족족 양키스에 패하기 일쑤였어요. 내리 5번을 졌는데, 거의 두산과 SK를 방불케 하는 전적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51년 흑역사도 있죠. 그래도 55년 양키스를 꺾고 첫 우승을 거둡니다. 팬들은 기뻐했습니다.


1955년, 7차전 끝에 양키스를 물리치고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둔 다저스


하지만 다저스는 뉴욕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1957년, 운명의 해

초대형 사건의 발단은 구장 문제였습니다. 당시 다저스 구단주는 월터 오말리라는 사람이었는데, 낡은 홈구장인 에베츠 필드를 헐고 새 구장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관중석도 많지 않고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았죠. 오말리는 유명 건축가인 버크민스터 풀러(!)에게 설계를 맡겨 돔구장(!)을 지으려고 했는데, 거절당합니다. 현대 뉴욕의 경관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거물이자, 당시 뉴욕시 건설국장이던 로버트 모지스가 반대했거든요. 모지스는 대신 퀸즈 부지를 제안했어요. 브루클린이 아니었죠. 오말리는 거절합니다.


좌: 풀러와 돔구장 모형을 둘러보는 오말리 출처: walteromalley.com 우: 로버트 모지스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그러자 오말리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메이저리그 구단 유치를 시도한다는 점을 떠올렸습니다. 말씀드렸듯, 서부에도 야구 리그가 아주 없지는 않아서 트리플 A 리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갈증을 해소하기엔 부족했고, 갈증 해소와 더불어 도시 발전을 목표로 서부 대도시들이 프로스포츠 유치에 나서고 있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시는 원래 워싱턴 세너터스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오말리가 제안을 넣은 겁니다. 로스앤젤레스 시는 새 구장 건설 지원을 약속했고 이것이 오말리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편 자이언츠도 샌프란시스코 시로부터 유치 제안을 받았습니다. 자이언츠도 다저스와 비슷한 사정이었는데요, 홈구장 폴로 그라운즈는 당시 지은 지 70년을 바라보는 구장이었거든요. 더불어 다저스에 밀리면서 관중 수 감소로도 골몰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원래 자이언츠는 미네소타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오말리가 자이언츠 구단주 호레이스 스톤엄에게 같이 서부로 가자고 설득합니다. 샌프란시스코 시장과의 만남도 주선해 주죠. 1957년 여름, 스톤엄은 마음을 바꿔 샌프란시스코행을 수락했고 연고지 이전이 발표됩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양키스가 아무리 뉴욕을 장악하고 있었다지만, 양키스의 독주에 반감을 품은 팬도 상당했거든요. 특히나 다저스의 주요 팬층이었던 저소득층의 반대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악당 두 명에 오말리와 같은 방에 있는데 총알이 두 발 있다면 누구를 살릴 것인가'란 질문에 그냥 오말리에게 두 발을 다 쏘라고 답하는, 영미권에서 자주 쓰이는 농담의 주인공이 됐고요. 자이언츠의 마지막 홈경기에서는 팬들이 단체로 '스톤엄의 목을 매달겠다'는 구호를 부르기도 했답니다. 이전에 반대하는 노래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역시 브로드웨이와 쇼 비즈니스의 도시네요.


노래 "Let's Keep the Dodgers in Brooklyn"을 부른 가수 필 포스터의 <에드 설리번 쇼> 출연


하지만 이전은 강행됐습니다. 1958년 봄, 브루클린 다저스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뉴욕 자이언츠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됩니다.


메이저리그, 서부를 발견하다

결과는 성공이었습니다. 서부 주민들은 열렬한 환영을 보냈어요. 메이저 프로스포츠 구단이 없다시피 했던 서부에서 다저스와 자이언츠는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서부 주민들의 스포츠 갈증을 단박에 해소해 줬습니다. 연고지 이전의 단초를 제공한 관중 감소 문제도 저절로 해결됐습니다. 1958년 다저스 개막전에는 8만 관중이 운집하면서 개막전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고요, 57년보다 80만 명이 증가한 180만 관중을 동원하는 데 성공합니다. 자이언츠도 홈구장 수용인원이 23,000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58년 120만 관중, 59년 140만 관중을 동원하는 대박을 칩니다. 이전 직전 2년은 불과 60만 명대였는데 말이죠.


1958년 4월 18일, LA에서 열린 다저스 대 자이언츠 경기


두 구단은 곧바로 두 도시에 정착합니다. 성적도 따라왔어요. 힘을 얻은 다저스는 1959년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합니다. 60년대에는 명예의 전당 투수 샌디 코팩스와 함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62년에는 오말리가 바라던, 많은 좌석에 주차장이 넓은 새 홈구장 다저 스타디움이 개장합니다. 그리고 매년 200만 관중은 가볍게 넘기는 인기 구단이 되죠. 자이언츠도 60년 구장을 캔들스틱 파크로 옮기면서 100만 관중은 너끈히 모을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합니다. 다저스를 꺾고 62년 월드시리즈에 나서기도 했죠. (물론 양키스에게 졌습니다.) 두 구단 모두에 이익이 된 셈입니다.


하지만 당시 뉴욕 팬들은 눈 뜨고 코 베인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분노한 팬들은 '우리 팀을 뉴욕에 돌려놔라'라고 외쳤고, 1959년 브랜치 리키 전 다저스 단장과 윌리엄 셰이 변호사가 중심이 되어 ‘콘티넨탈 리그’라는 제3리그를 설립하고 뉴욕에 새 구단을 창립하려는 시도가 벌어집니다. 여러 문제로 창설은 무산되었지만, 리그 확장 운동에 자극을 받은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새 시장의 발전 가능성을 인정하고 61년과 62년 각 리그별로 2구단씩을 창단합니다. 뉴욕도 포함돼 있었죠.


1962년 창단한 새 뉴욕 구단, 뉴욕 메츠는 다저스와 자이언츠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각 구단의 상징 색깔인 푸른색과 주황색을 가져와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두 색깔 모두 뉴욕을 상징하는 색깔이기도 합니다.) 과거 다저스의 스타 선수였던 길 호지스를 데려왔고, 처음 몇 년은 과거 자이언츠가 쓰던 폴로 그라운즈를 홈구장으로 썼습니다. 그러다 1964년, 모지스 국장이 제안했던 퀸즈 부지에 새 홈구장을 짓습니다. 경기장 이름은 셰이 변호사의 이름을 따 '셰이 스타디움'으로 지었죠.


좌: 1962년 창단 당시 메츠 로고 출처: sportslogos.net 우: 셰이 스타디움 출처: 메츠 페이스북


(원래 자이언츠가 옮기려고 했던 미네소타 지역은 워싱턴 세너터스가 옮겨가게 됩니다. 로스앤젤레스 시가 끌어들이려고 했던 구단이었죠. 그리고 이름을 '미네소타 트윈스'로 바꿉니다. 메이저리그는 이후에도 확장을 거듭하다, 1998년 2개 구단 확장을 마지막으로 30개 구단 체제를 갖춥니다. 아직도 북동부와 중부에 17개 구단이 위치해 있지만, 서부와 남부에도 13개 구단이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 균형이 해소됐습니다.)




에필로그: 상상보다 거대한 결과

이 사건으로 메이저리그, 나아가 미국 프로스포츠는 서부라는 엄청난 시장의 잠재가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농구와 미식축구도 서부로 영역을 넓히기 시작합니다. 1960년 NBA의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가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했고, 뒤따라 필라델피아 워리어스도 샌프란시스코로 이전하며 서부로 진출합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명문 LA 레이커스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분기점이었습니다.


'미국 전 지역에서 즐길 수 있는 프로스포츠'란 개념이 비로소 확립됐습니다. 서부만 아니라 남부도 프로스포츠를 원하고 있었어요. 먼저 미식축구 리그 AFL이 텍사스와 플로리다 등을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미국에서 가치가 가장 높은 프로스포츠 구단인 댈러스 카우보이스가 바로 이때, 1960년에 창단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한 구단이 남부로 이전했는데요, 바로 다저스와 자이언츠의 이전을 자극한 밀워키 브레이브스였습니다. 66년 애틀랜타로 이전한 뒤, 한동안 유일한 남부 구단으로 뛰며 확실한 관중 동원력을 보여줬습니다.


그렇게 베이브 루스가 이끌던 야구는 <바빌론>의 땅, 할리우드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두 구단의 이전은 상상보다 거대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글은 본래 2016년 10월에 썼던 글로, 2023년 3월에 맞추어 개작한 것입니다.

배경사진 출처: ml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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