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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석 Jun 04. 2023

작문 연습: 그림 한 장

AI 덕분에 졸지에 디자이너가 되었다

Morten Lasskogen, Lost, 2020


가경은 어느 날 호기심이 들었다. 요즘은 AI가 그림도 그려준다며? 며칠 전 간 에드워드 호퍼 전시회가 생각났다. 현실에 있을 법한 풍경이면서, 빛깔부터 사물 배치까지 모든 게 이상하리만치 잘 정돈된 그림이 좋았다. 그런 그림도 그려주는지 궁금했다. 입력창에 적었다. 에드워드 호퍼 같은 청량하고 빛이 잘 드는 그림 하나만 그려줘. AI는 그림 네 장을 그려줬다. 오른쪽 맨 끝에 있던, 보랏빛 오후 구름이 창 사이에 스며든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독특했다. 사진을 내려받아 카카오톡 프로필로 삼았다.


그림이 무척 예쁘다며 메시지가 왔다. 이거 너가 그린 거야? 가경은 갑자기 자기가 만든 양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 이거 내가 그렸어. 진짜? 너 포토샵도 다룰 줄 알았어? 응. 나 틈틈이 공부했어. 진짜? 대단하다. 친구는 더 이상 그림을 묻지 않았다. 가경은 대화를 잊고 지냈다. 친구는 다시 연락했다. 너한테 소개해줄 게 있어. 내 친구가 하는 작은 뉴스레터인데, 디자이너를 찾는대. 일주일에 그림 한 장인데, 돈이 안 벌려서 변변친 않아도 만 원 돈은 준대. 그쪽에 이미 말해 뒀어. 만나 봐. 가경은 졸지에 디자이너가 됐다.


엄밀히 따지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잠시 갈등했지만, 가경은 어쩌다가 창조한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AI로 만들면 되는 일이니까. 친구의 친구와 만난 자리에서 가경은 AI에 시켜 만든 포트폴리오를 보여줬다. 에드워드 호퍼 좋아하세요? 네. 저희가 하고 싶은 건 사실 호퍼 스타일까진 아니어서, 혹시 다른 건 없으세요? 아뇨. 항상 그렇게만 작업해서요. 원하시는 스타일은 뭔데요? 가경은 친구의 친구가 보여준 이미지를 잘 기억했다가, 문장으로 잘 다듬어 입력창에 넣었다. 친구의 친구는 그럭저럭 만족해했다.


가경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가짜 디자이너를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했다. AI 서비스가 무료 요금제를 폐지하고 구독료를 받기 시작했다. 가격은 대충 만 원쯤 했다. With your fee, we can provide you a better image. 그렇게 말했다. 시간도 많이 들었다. 기술은 좋아서 얼굴은 알아볼 수 있었지만, 코끝이나 눈동자 선이 뭉개져 있었다. 친구의 친구는 종종 그런 얼굴을 보고 AI로 그린 게 아니냐고 놀렸다. 가경은 다른 사람의 눈동자 앞에서까지 태연히 거짓말을 할 성정은 없었다. 한 달에 만 원인 포토샵 프로그램을 사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친구의 친구가 먼저 가경을 해고했다. AI 서비스 구독하면 한 달에 만 원만 내면 된대요, 보정은 제가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는데 죄송하게 됐어요. 끝까지 가경의 비결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가경은 거짓을 들키지 않아 내심 안심했다. 포토샵 프로그램은 결국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AI에 몽땅 맡겨 그림을 그려왔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짜 디자이너가 되어야 했다. 이미 몇 번, 알고리즘의 힘을 빌린 그림을 제 것인 양 인스타그램에 올린 적도 있었으니까.


가경이 인스타그램에 새로 올린 그림에선 좋아요가 줄었다. 전보다 대충 다섯 배쯤이었다. 가경은 내심 안심했다. 그 그림은 스스로 그린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림은 Morten Lasskogen의 <Lost>. 2020년작. 덴마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3D 아티스트다.

https://www.instagram.com/iammoteh/

https://www.lasskog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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