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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팝콘 말고 나초 말고 Jun 03. 2021

<소공녀(2017)>, 행복할 거야 집이 없어도

*스포일러 주의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나는 행복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슬프지만 주인공이 행복해질 수 있는 영화. 이렇게 얘기했더니 친구가 <소공녀>를 추천해줬다. <소공녀>의 미소의 삶은 디즈니 같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진 않지만 주체적이고 적극적이다.


    미소는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게 뭔지 분명히 알고 그걸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걸 위해 집을 내어놓더라도. 미소에게 집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고정되고 단단한 것처럼 보이는 집은 오히려 무너지기 쉬운 허상에 불과하다. 미소에게 "갈 곳"은 그가 사랑하는 것들이 그를 따스하게 맞아주는 곳, 환영받을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미소는 함께 있어 행복했던 대학 밴드 친구들의 집에 찾아간다.



2.

    사람들은 집, 부동산이 물질적이고 정서적인 안정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소가 찾아간, 버젓한 집을 가진 그들의 삶은 한 군데씩 망가져있다. 첫 번째로 찾아간 문영은 '밥보다 포도당 주사가 낫다'며 스스로 팔에 주삿바늘을 꽂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문영은 '버젓한 사회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다. 큰 건물에 휴게실까지 있는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는. 그가 '정상 사회인'이 되기 위해선, 주기적으로 포도당 주사를 맞아야 한대도 몸 사리지 않고 일하면서, 담배를 피워서도 안 된다.


    다행히 현정은 미소를 반갑게 맞아준다. 다행이다, 하룻밤은 춥지 않게 지낼 곳이 생겼다. 하지만 오랜만에 본 친구가 사는 모양새가 그다지 좋지는 않다. 전세 아파트에 함께 사는 시부모는 소금덩이 떡국을 먹으면서도 손가락 까딱 하지 않고, 남편은 방관자처럼 무책임하다. 방음도 잘 되지 않는 집은 날마다 반갑지 않은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철장 같다. 종일 몸이 붓도록 집안일을 하고 미소와 나란히 누워있자니 현정은 눈 앞이 캄캄하다. 이대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에 눈물을 터뜨리는 현정에게 미소는 위로를 강요하지 않는다. 미소는 현정의 삶을 함부로 동정하지 않는다. 그저 힘들구나, 하며 묵묵히 바라봐줄 뿐. 미소는 현정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해준다.


    미소가 다음 집으로, 그다음 집으로 옮겨갈수록 긴장은 고조된다. 잘 사는 듯 보이는 친구들 중 실상은 괜찮은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내게 가장 기억에 남았던 방문은 세 번째로 간 대용의 집이다. 마음이 여린 대용은 아내가 떠나간 후 사람을 마주 보는 게 힘들다며 방문을 사이에 두고 미소와 이야기한다. 번지르하게 마련해둔 집은 그에게 족쇄이고, 그 안을 채울 것은 빈 소주병 더미와 쓰레기밖에 없다. 월급의 절반을 이자로, 20년을 부어야 '내 집'이 되는 공간. 그 넓은 집에서 대용은 제일 작은 방구석에 쭈그려 소주를 마시며 곪은 속을 움켜쥔다. 미소는 마음이 아픈 사람을 보듬어준다. 어쭙잖은 위로의 말이 아니라 가만히 지켜보기. 여기에서도 미소는 대용을 위해 따뜻한 밥을 짓는다.


    나는 미소가 대용이 일상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주면서 계속 같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렇게 될 수 없었다. 어딘지 기묘하게 생긴 록이의 어머니는 과장된 친절을 베풀며 미소를 맞는다. 그리고 역시, 이유 없는 친절은 없다. 안정감 운운하던 록이 가족은 미소를 새장의 새처럼 가두어 버린다. 새 모이 주는 것 마냥 햄버거에 담배까지 사다 두고서. 록이에겐 정상가족이란 게 '집'처럼 굳이 굳이 만들어야 하는 거였나 보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정희는 대궐 같은 집에 가사도우미를 두고 남부럽지 않은 '사모님'이 되어있다. 하지만 예의 그 웃음에서는 불안이 느껴진다. 애써 자신이 아닌 모습이 되려 노력하는 사람의 위태로운 밧줄 타기. 뜨거운 사람이었던 정희는 남편 앞에서 다소곳하고 정숙해야 하며, 존경의 눈빛을 담아 손수 물까지 따라주어야 한다. 정희는 그 가면이 너무 중요한 나머지 미소의 취향마저 비난한다. 미소가 그렇게 소중하고 간절하게 지키려 했던 것들인데.


    미소의 마지막 위로 대상은 '직업여성'인 민지다. 눈물 콧물 흘려가며 '언니, 무슨 말인지 알아요? 언니 짤렸다고, 유 파이얼!' 하고 내뱉는 민지에게 미소는 백숙을 해준다. 민지에게는 얼마나 오랜만에 먹어보는 정성스러운 밥이었을까. 미소는 민지를 평가하지 않는다. 네일숍을 할 거라는 민지의 꿈을 응원하며 잔잔히 웃어준다. 문득, 그럼 우리 미소는 누가 위로해주나, 싶더라.



3.

    사실 영화 초반엔 나도 정희와 비슷한 생각을 했더랬다. 미소에게 '일반적'이라는 잣대를 들이밀며 '그거 담배 끊고 위스키 안 마시면 되는 거 아닌가, 약 끊고 염색할 수도 있겠다,' 하고. 하지만 누군가의 삶은 그렇게 판단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담배가 집보다 중요할 수도 있다. 그 겨울바람도 못 막는 네모진 데 들어가서 월에 30을 꼬박꼬박 내느니 위스키 한 잔 더 마시는 게 더 행복할 수 있다. 그게 그 사람에게 행복이라면, 내가 그걸 그만두라고 할 권리는 없다.


    애석하게도 영화 후반부의 미소는 소중한 걸 하나씩 잃어간다. 소중한 걸 놓지 않으려고 집을 나왔는데 한솔이는 타국으로 떠나버리고 담배도, 위스키도 더 더 비싸진다. 집도, 일도 없이 방문한 단골 술집은 왜인지 그날따라 사람이 붐빈다. 내 앉을자리는 구석 창가뿐인데, 참 얄궂게도 눈이 내린다. 집 없는 이에게 눈 오는 날은 야속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는 아마 소중한 것들을 쉽사리 놓아버리지 않을 거다. 좋아하는 마음은 생존력이 강하다. 결말부의 미소는 백발이 다 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모습은 마치 어디서 본 것처럼, 나의 일상 속 한 조각처럼 익숙하고 왠지 쓸쓸하다. 좋아하는 단 몇 가지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거리에서 타인으로 지나쳤던 머리가 희끗한 노숙인이 생각났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어째서 난 그들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을까.

    <소공녀>는 'Microhabitat(미생물 서식 환경)'이라는 영어 제목에 걸맞게 집과 관련된 다양한 생활 양상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집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것처럼 굴지만, 그리고 더 좋은 집을 가지기 위해 안달하지만 그 안에서 자유롭기는커녕 억압된다. 좁다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사는 미생물처럼.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다들 그 작은 네모 상자에 몸을 구겨 넣지 못해 안달인 건지. 갈 곳 없는 미소가 오히려 더 편안해 보이는 건 그 때문일까. <소공녀>가 좋은 점은, 등장인물들의 집에 대한 집착이 현대를 사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점이고, 이 틀에 맞지 않는 미소가 이들을 구원한다는 점이다. 위로보다는 구원이라고 하고 싶다. 미소가 그들의 집에 남긴 반향은 작게나마 남아 언젠간 스스로 문을 박차고 나오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4.

    영화 속 유머 코드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나 싶을 정도로. 미소네 집주인 아저씨도, 미소가 들고 다니는 돈통도, 기껏 얻어낸 쌀 몇 움큼이 오면서 내내 질질 새는 것도 너무 웃기다. 어떻게 이런 잔인한 상황을 이렇게 유쾌하게 풀어내지. 한솔이랑 헌혈해서 영화 티켓 받는 거, 록이는 전립선이 안 좋고 록이 엄마는 기이한 거, 다 싫다더니 초코파이 부스럭거리니까 문 여는 대용이, 약간은 미친 것 같은 미소 친구들이랑 민지도. 잔잔하게 웃는데 자존감도, 생존력도 강한 미소도 너무 좋다. 그 와중에 업으로 삼는 게 가사일인 것도 최고야. 가사는 엄연한 노동이라는 것, 여성에게 부과된 의무가 아니라는 것, 그럼에도 여성이 가사를 좋아하고 잘해도 된다는 것, 왜냐하면 한 집안을 보듬는 건 너무 따뜻한 일이고 마음을 쏟는 일이니까. 집이 없는 미소는 정말 아이러니하게 그 자체로 '집'같다. 포근하고 안정적이고 따스하다. 사실 그래서 미소에게 집이 필요하지 않았던 걸까. 미소가 행복하면 좋겠다. 좋아하는 것들을 가만히 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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