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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팝콘 말고 나초 말고 Sep 26. 2021

<올드보이(2003)>, 복수라는 허무

*스포일러 주의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올드보이(2003)>를 드디어 봤다. 복수극은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와이 우먼 킬(2019)>이 좋았던 걸 생각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보단 잔인하거나 피 튀기거나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싫은 거였는데, 의도치 않게 최근 날이 더워진 이후 본 영화가 <킬 빌(2003)>이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등등 이었다. 그래도 이것들은 계속 보니까 정도 들고 재미있는 것도 같고 나중엔 타며들어서(타란티노에 스며듬) 킥킥거리면서 보기까지 했는데...그랬는데...


<올드보이(2003)>는 전혀 웃으면서 볼 수 없는 영화다. 타란티노는 박찬욱에 비하면 코미디언이었다. 정말로. 헐리웃의 복수극은 대부분 피가 튀고 사연이 절절해도 과업이 완료되면 통쾌하고 깔끔하게 정리된다. 배드가이 아웃, 해피 엔딩. 심지어 어떤 부분에서는 유머 요소가 들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올드보이(2003)>에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선한 사람도 악인이 된다. 복수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회의가 영화를 관통하는 테마였다.



<올드보이(2003)>의 주인공은 둘이다. 이우진과 오대수. 둘은 서로 다른 이유로 상대방에게 복수를 하려 하고 결국에는 성공하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그 이유는 복수가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고, 복수의 이유조차 타당성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우진이 15년간 복수를 계획한 건 오대수의 세치 혀가 수아를 죽여서다. 이우진은 오대수를 자기와 같은 근친 상황에 빠뜨리고 고통을 주며 오대수가 용서를 빌게 만든다. 그런데 이 복수로 박찬욱 감독이 전달하려는 게 '남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고 다니지 말자'일까? 오대수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15년을 감금 당할 만큼은 아니다. 수아가 자살하려 할 때 손을 놓은 건 이우진이었다. 함께 감당했어야 할 일을 수아가 짊어지게 한 것도 이우진. 유지태의 엘리베이터 씬은 이우진이 과거의 죄책감을 놓지 못하고 있었고, 수아의 죽음의 근본적인 원인은 오대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대수가 혀를 자르고 용서를 구한다고 해서 수아가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결국 이우진은 허무를 느끼고 자살한다.


오대수가 복수를 하는 건 영문도 모른채 15년이나 감금당하고 아내마저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오대수는 식사가 들어오는 구멍에 대고 '이유나 좀 알려달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네가 뭘 잘못했다고 친절히 설명해줘야 할 이유도 의무도 없다. 이우진이 말하듯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도 가해자의 사치다. 그래서 오대수의 복수도 본질을 잃고 자해가 된다.


오대수의 감금방에는 그림이 한 점 걸려있다. 그림 속 남자는 가시관을 쓰고 우는 듯한 눈을 가지고 있지만 입은 웃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글귀가 써있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그림은 제임스 엔소르의 '슬퍼하는 남자'이고 글귀는 엘라 윌콕스의 '고독'에서 따온 말이다. 그림 속 남자와 오대수는 슬프지만 울지 못하고 웃음을 강요당한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 스스로가 한없이 비참하고 나약하다는 걸 깨닫고 걷잡을 수 없이 고통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대수는 견딜 수 없을 때마다 억지 웃음을 짓는다. 이 때문에 오대수는 행복해지지 못할 것이다. 함께 울어줄 사람이 곁에 있는데도 보지 못한채, 오대수는 자신의 나약함과 마주하기를 거부한다. 결국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우지만 '진짜 웃음'은 짓지 못하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처럼 가파르고 황폐한 산맥을 바라본다.



명대사도, 미장셴이 탁월한 장면이 너무 많아 하나하나 분석하려면 정말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다만 색에 의미를 부여해 사용한 게 초록과 빨강, 흰색의 대비가 좋았다. <친절한 금자씨(2005)>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빨간색은 죄의식, 흰색은 새로운 시작과 innocence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게 전혀 뻔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쓰여서 화면을 보는 게 너무 즐겁다.(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안즐겁다..)



복수 3부작으로 묶이는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가 있다. <복수는 나의 것(2002)>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후에 <아가씨(2016)>로 이어지는 이 계보에는 나름의 유의미한 지점이 있다. 복수의 주체가 여성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복수가 또 다른 속박이 아닌 해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올드보이(2003)>의 오대수는 복수가 끝났음에도 자신의 죄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미도와 살아가야 한다. 기억은 지워졌지만 오대수의 복수가 가시관 같은 속박이 된 것이다. 하지만 <친절한 금자씨(2005)>의 금자는 끔찍한 일을 해야했던 스스로를 비관하면서도 동정하는, 나약함을 받아들이고 새 출발을 바라는 모습을 보인다. 더 나아가 <아가씨(2016)>의 히데코는 복수를 해방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박찬욱표 복수극의 이런 톤 변화가 나에게는 반가웠다. 하나의 테마에서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 페미니즘적 시류까지 반영했다는 게 좋았다.


여간 감정적으로 매우 힘들었지만 잘 만든 영화를 볼 수 있어 좋았고...박쥐는 볼 엄두기 안 나서 리틀 드러머 걸을 봐야겠다. 한국에 이미 너무 천재적인 감독들이 나와버린 것 같아 걱정이지만 한편으론 앞으로 10년 안에 또 한 번의 르네상스가 있지 않을까 하는 뭐 그런 생각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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