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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팝콘 말고 나초 말고 Sep 26. 2021

영화 스터디 일기 : 이창(1954)

*스포일러 주의

이번에 영화를 같이 만든 멤버들과 영화 스터디를 만들었다. 아마 계속 영화를 공부할 것 같은 사람으로서 계속 생각하는 훈련은 중요한 것 같다. 발제문과 스터디 후의 감상을 기록해본다. 


210925 ‘이창(1954)’ 발제문


1.

‘이창’의 ‘이’는 한자 ‘속 이’ 자를 쓴다. 속, 내부라는 뜻으로 ‘이면’, ‘심리’ 등의 말에 쓰인다. 영어 제목은 ‘Rear Window’로 ‘뒷창’이라는 뜻인데 ‘내부 창’과는 뜻이 아무래도 다르다. 주목할만한 점은 두 제목 다 창이 난 위치에 신경쓴다는 점이다. ‘이창’에서 주인공 제프리가 이웃 주민들을 넘겨다보는 창문은 건물 앞 도로가 아닌 건물 뒤 공용 뜰로 나 있다. 주민들의 사생활이 공개되는 창문들도 각 건물의 뒤뜰을 향한다. 층층이 올려진 수많은 창문과 발코니가 이 뒤뜰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다. 그래서 ‘ㅁ’자로 만들어진 이 작은 주거단지에서 뒤뜰은 모든 사람의 시선이 모이는 곳이자 외부로부터 차단된 공간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의 시선은 이 직사각형의 공간 안에 갇힌다. 건물 앞에 난 창으로 뭐가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갇힌 공간에서, 보여지는 삶과 사적인 삶의 경계는 무너지고 혼재된다. 내가 기르는 개, 내가 가꾸는 꽃밭, 간이의자에 앉아 햇빛을 즐기는 내 모습까지 모든 게 공유된다. 공유되는 일상은 묵인되거나, 지워지거나, 관음된다. ‘이창(1954)’은 이런 상황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2.

보통 ‘이창(1954)’은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해석된다. 영화를 보는 행위와 극장에서의 체험을 불가분의 관계로 보는 관점이 있다. 불 꺼진 극장에 스크린과 관객만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관객은 영화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는 죽음과 부활로 비유되기도 하는데 어두운 공간(동굴, 죽음)에서 영화를 보고 밝은 빛(지상, 부활) 아래로 다시 나온 사람은 그 전과는 다른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창(1954)’의 공간이 되는 폐쇄적인 뒤뜰은 그 안에서만 사건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극장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리고 이웃의 창문은 스크린이 된다. 창문을 통해 정보가 제한적으로 제공되고 제프리는 창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제프리를 거동이 불편한 인물로 설정한 건 극장 체험에서 관객이 수동적인 뷰어가 될 수 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3.

‘이창(1954)’에서 두드러진 건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정확히 목표한 바를 이뤄낼 수 있게 설계되었다. 대개 서스펜스를 만들 때에는 정보의 지연이나 제한을 이용하게 된다. 제프리는 이웃의 모든 걸 관찰하는 듯 보이지만 창문에 비치지 않은 것-창문과 창문 사이, 또는 건물 밖에서 벌어지는 일-과 잠깐 한눈 판 사이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제프리의 시선을 따라가므로 관객 또한 제프리에게 주어지는 정보를 제한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고, 그런 것들이 긴장을 만들어낸다. 서스펜스에 빛을 사용한 것도 인상적이다. 불을 환하게 밝힌 이웃 주민들과 달리 제프리는 불을 끈 채로 어둠 속에서 사람들을 관찰한다. 상대편에서 이쪽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제프리와 관객은 안전함을 느낀다. 하지만 상대편의 불이 꺼져 있거나 제프리 쪽의 불이 켜져 있는 상태에서는 긴장이 조성되고, 그 때 바로 제프리가 들키게 된다. 사실상 낮 동안은 불의 유무와 관계 없이 창에 주민들의 사생활이 전부 투영되는데, 그 때에도 관객은 언제든 주민 중 누군가가 제프리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이런 장치들이 영화 전반에 불안감을 준다. 특히 소워드(Mr. Thorwald)가 제프리의 아파트의 들이닥치는 시퀀스에서는 제프리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긴장이 극에 달한다. 제프리가 기지를 발휘해 플래시를 터뜨리지만, 영화는 플래시가 터진 뒤에 제프리의 잔상이 오히려 더 선명히 보인다는 걸 소워드의 시점에서 제시하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소워드가 한 발 한 발 다가설 수록 마음을 졸이다가 경찰이 들이닥치면서 해소가 되는 것이다. ‘이창(1954)’은 한 컷 한 컷의 의도가 너무 정직하고 투명한 탓에 교과서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덕분에 정확히 의도된 서스펜스를 만든다.



Q. 주의 깊게 본 다른 영화 요소가 있었는지?

Q. 히치콕의 다른 영화, 또는 다른 스릴러 장르 영화와의 유사성이 있는지?




스터디 후 생각 정리


1.

히치콕은 종종 도착적이고 프로이트적인 요소를 영화에 끼워넣었다고 한다. ‘이창(1954)’에서의 노골적인 관음과도 연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제프리가 넘겨다보는 작은 커뮤니티는 관음과 노출, 묵인과 소외를 보여준다. 안이 훤히 보이는 창으로 제프리 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서로를 볼 수 있을 건데, 그래서 자신들이 누군가를 관찰하듯 자신도 관찰 당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도 커튼을 치지 않는다. 히치콕은 누구나 관음증 아니면 노출증을 가졌다고 했다. 이 커뮤니티는 창문을 통해 서로 다른 시선이 이리저리 교차되는 걸 묵인하고, 그럼으로써 서로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규칙을 통해 유지된다. 죽은 개의 주인이 이웃들의 비정함을 비난하는 건 이런 점에서 모순적이다.



2.

‘이창(1954)’의 관음은 영화를 보는 행위 뿐만 아니라 만드는 행위에까지 연결된다. 영화는 타인의 일상, 감정과 결핍, 삶 전체를 들여다보곤 하니까.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보는 관객은 관음의 주체이긴 하지만 이야기에서, 인물에 몰입하고 공감하기도 한다. 영화 속 사건과 인물에 대한 관음과 대리만족은 사람들이 전래동화나 연극을 좋아했던 방식으로 행해진다. 한편 창작자는 허구의 이야기일지라도 그 허구 속 누군가의 삶을 관음하고 입맛대로 편집해 노출시킨다. 그 삶이 ‘보여져야 하는’ 방식으로, 때로는 노골적이거나 폭력적으로.



3.

이 때 창작에서의 당사자성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다. 허구의 타자가 대표하는 삶과 문화가 있다면 이를 이야기와 화면으로 짜깁기 하는 주체는 당사자성을 가져야 하는가? 백인 이성애자 남성 주체가 비백인 여성 퀴어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가, 또는 다뤄도 되는가. 당사자성의 유무에 따라 창작의 윤리성이 판단될 수 있는가. 중요한 건 해당 문화에 얽힌 권력관계, 그리고 표현 방식일 듯 하다. 때로는 대표성을 띠지 않는 인물에서 이러한 당사자성 및 문화 도용의 문제를 피해갈 수도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HBO 드라마 ‘위 아 후 위 아(2020)’에서 흑인 가정의 아내 ‘제니’를 연기한 페이스 알라비(Faith Alabi)는 인터뷰에서

“It’s such a joy as a black person to just be able to tell a story with a family that’s struggling with universal themes, rather than being characters that represent race.(흑인으로서 그저 인종을 대표하는 캐릭터가 되기보다 보편적인 문제들로 애쓰는 가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라고 말했다. 민감하게 다뤄야 할 인물에게서 굳이 대표성을 끄집어내려고 하거나 모든걸 성적, 인종적 특성에 귀결시키지 않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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