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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an 13. 2021

정당한 분노

나딘 라바키, 가버나움

Capharnaum, Capernaum, 2018, 레파논/프랑스, 126분



 영화의 제목 가버나움은 예수의 두 번째 고향으로 불리던,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북쪽 끝 마을이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숱한 환자들을 살리고 기적을 일으켰으나 가버나움의 시민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결국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나딘 라바키(감독)는 한 치의 희망도 없는 장소를  가버나움에 비유해 내세운다. 이곳에 사는 아이들은 어느 나라의 아이들보다 작고 말랐다. 때문에 12살 아이도 12살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작은 몸으로 아이들은 담배를 피우고 나무각목을 덧대어 총모양을 만들고 막노동을 하고 강간 당하고 폭행 당하며 자명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비정상적 세계가 진리라는 듯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다고 호소하는 12살 소년 자인이 있다. 자인은 여린 팔목에 차가운 수갑을 찬 채 덤덤하고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 충격적인 시퀀스를 추적하는 것이 단순히 말하자면 영화 구성의 전부다.

 자인은 거칠고 폭력적이다. 너무 일찍 노동과 판매의 전선으로 뛰어들었고 악을 쓰고 기를 쓰며 욕설을 내뱉어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소년과 소녀가 이미 폭력을 내재화하고 있다고 해서, 폭력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어른들보다 더욱 더 투명하고 올바른 시선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해낸다. 자인은 수없이 많은 동생들 중 가장 애정하는 여동생 사하르가 생리를 했을 때, 자연스럽게 그것이 얼마나 위협적인 사건인지 깨닫는다. 생리란 여성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동생의 피 묻은 속옷을 빠는 자인의 얼굴은 불안으로 점철되어 있다. 작은 소년이 자신보다 작은 소녀에게 일어날 일을 예감하는 것은 형용할 수 없이 비극적이다.

 불행한 예감은 언제나 우리를 지나치지 않는다. 자인의 모부는 자신들의 가난을 한 차례 넘기기 위해 고작 11살 밖에 안 된 사하르를 족히 서른은 된 남자에게 팔아버린다. 판다는 표현이 몹시 부적절하고 불쾌하지만 정말 그들은 자신의 딸을 팔았고, 남자는 그 어린 소녀를 향해 발정나 침을 질질 흘리며 구매했다. 여동생과 도망칠 계획이었던 자인은 끝내 그것을 막지 못한 채 집을 나간다. 돈도 없고, 갈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지만 떠날 수밖에 없다. 약자에게 떠남이란 어느날의 충동이나 자의적인 치기가 아니다. 떠나야만 살 수 있다면 떠남은 선택된 것이 아니라 부득이한 것이 되기도 한다.

 이 여정 속에서 자인은 불법 체류자 라힐을 만난다. 라힐은 서류가 없어 늘 숨어 지내는 신세고 라힐이 낳은 아기 요나스도 마찬가지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럼에도 라힐은 자인을 외면하지 못하고 집으로 들인다. 자인은 라힐이 일을 하는 동안 아기를 돌보게 되고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허점을 채워주며 미묘한 가족관계를 형성한다. 위태롭고 증명되지 않은 이들의 유대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라힐은 경찰에게 잡혀 수감되고 만다. 아무리 기다려도 라힐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자인은 요나스와 단 둘이 남겨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인이 요나스를 돌보아야 한다.

 고작 12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아기를 돌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자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사력을 다해 요나스를 보호하고 먹이려 들며 어디를 가도 함께 간다. 요나스를 모른 척 집으로 돌아간다거나, 요나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거라는 어른들의 얄팍한 예상을 깬다. 라힐이 요나스를 버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인은 요나스를 자신의 동생으로 명명한다. 여동생 사하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의 영향도 있었다. 자인은 단언컨대 영화 속 어떤 어른보다 능동적이고 능률적이다. 약을 넣은 물도 팔아보고 난민 행세를 해 보급품으로 요나스가 먹을 분유와 기저귀를 얻기도 한다. 자인은 실패한 적이 없다. 다만 나아지지 않을 뿐이다. 나아지지 않는 삶이란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인은 요나스와 스웨덴으로 갈 것을 꿈꾸기도 한다.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을 벗어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이 없는데도 나아가려는 작은 아이를 보며 내가 느끼고 있던 깊은 절망감의 실체는 아마도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편협한 어른으로서의 확신때문이 아니었을까. 

 자인은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자신에게 선뜻 호의를 건네려 하는 어른을 보면 아무리 허기가 져도 경계했다. 그러나 정말 갈 곳 없이 길거리로 쫓겨났을 땐 어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 어른이 좋은 사람이 아닐 게 분명해도 선택지가 없다. 떠나야만 하고 그것 밖에 답이 없으므로, 요나스를 맡기고 자신의 서류를 찾아 집으로 돌아간다. 자인은 떠나기 위해선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서류가 필요함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집엔 어떤 서류도 없다. 소년의 모부는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을 보고도 언제나처럼 폭력적이고, 어떤 다정도 베풀지 않는다. 서류를 내놓으라는 날카로운 자인에게 그들이 건넨 것은 독촉장 따위다. 자인도 라힐과 요나스처럼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부유함의 실체를 깨닫기에 소년은 너무나 작다.

  그러나 끝내 놓지 않으려던 소년의 작은 희망을 빼앗을 비극은 예견된 듯 당도한다. 모든 걸 예감함과 동시에 부정하며 자인은 "누가 병원에 갔어요?"라는 절규 섞인 물음을 반복한다.

  11살,  자인의 동생 사하르는 두 달 만에 임신을 하고 심각한 하혈로 사망한다. 병원 앞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들어서지 못한다. 신분증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 작은 아이는 폭력과 폭력의 틈 사이에서 비참하게 살인(나는 희생과 살인 중 어떤 워딩이 맞을지 한참 고민했으나, 사하르의 죽음은 희생임과 동시에 더 명확히는 살인이라고 판단했으므로 살인이라 지칭한다) 당한다. 삶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기에 12살은 너무나 어린 나이지만, 그런 환경에서 희망을 가지고 12년을 버틸 수 있었던 아이는 몹시 드물다. 자인은 칼을 들고 집을 나선다. 자신의 동생을 죽인 남자를 죽이기 위해. 그토록 명료한 살의는 어떤 영화 속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수감된 자인의 눈 속에선 어떤 빛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종교에 열중할 때도 이미 모든 삶의 의지를 저버린 자인은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와중에 어머니의 임신 소식을 듣고 더욱 분노할 뿐이다. 제대로 키우지도 못할 아이를 무책임하게 끝없이 낳는 모부를 향한 분노를 참을 수 없다. 낳을 뿐 키우지는 않는 사람들이다. 재판장에서 자인의 친모는 자신만 자신을 비판할 수 있으며 아무도 자신을 비판할 수 없다고 울부짖지만 그 무책임한 간악함을 보며 우리는 치를 떨게 된다. 자신이 나름대로 애썼으므로 그것은 어쩔 수 없었고 부득이했으며 자신도 피해자라고 말하는 이들은 사회를 더욱 더 악화시키고 더불어 더 많은 피해자를 만든다. 나는 자비라는 말을 불편하게 생각하지만, 그들에게 내가 베풀 자비는 없다. 그들이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한 것들이 너무 많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결말부에 이르렀을 때, 자인은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에 전화를 건다. 그리고 자신의 사정을 처음으로 털어놓기 시작한다.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라는 강건한 말 이후 이어지는 자인의 목소리는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그는 모부가 아이를 더 이상 낳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인의 결심과 결정과 삶이 모두에게 이해되고 만다.

키우지 못할 아이를 낳기만 하는 어른들이 무고하다고 볼 수 있을까. 폭력과 가난을 대물림 하면서 아이를 마치 본인 소유의 재산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을 감히 모부, 가족이라 칭할 수 있나. 그들은 본인의 선택으로 낳았고 부득이하다고 변명하지만 본인의 선택으로 학대한 것이다.

 유독 길게 느껴진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 자인은 웃지 않았다. 냉소를 흘리거나 비웃을 뿐, 기뻐 웃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자인에게 사진기를 든 사람이 웃으라고 말한다. 신분증을 만들기 위해서. 자인은 그제야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어보인다. 한없이 지지부진하고 어렵기만 했던 영화가 그 티없이 맑은 미소로 끝날 거라 예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끝낸 뒤까지도 그 아이들을 책임지려 한 제작진들의 온기가 희망 따위 찾아볼 수 없었던 영화에서 해피엔딩을 찾아주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 가고도 이어지는 삶이 존재하지 않는가.

 분노를 정당하게 설득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영화임이 분명했다. 한 국가와 한 시대에 더할나위 없이 유의미한 작품이었다. 이곳이 가버나움이 아니면 어디가 가버나움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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