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미안해’ 한 마디면 용서할 수 있었어.
근데 이제 우리 엄만 늦은거지.
너희 어머니는 아직 가망이 있으신거고.
소아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
병원에서는 소아를 다른 인격체로 본다. 따라서 치료법 또한 성인과는 다르게 적용된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비단 내,외과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면에서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지금이야 부모님이 집에서 싸움이 나면
‘저 인간들 또 시작이네’ 싶어서 넘어가지만
어렸을 때는 세상이 흔들리는 정도를 넘어 생명에 위협까지 느꼈기 때문이다.
처음엔 ‘아니,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내가 싸우는 것도 아니고 그거 어른 둘이 싸운다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낄 일이었나? 난 정녕 약해빠진 생물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커서 아동 심리 관련 문서들을 찾아보곤 했을 때, 그것은 나만 그런게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만났던 친구는 학교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살았었다.
지하철 한 번을 환승을 해야했고, 역을 벗어날수록 길은 한적했다.
밤에 귀가할 땐 가로등이 없어 어두워서 핸드폰 라이트를 켜고 걸어야했고, 오래된 간판이 많이 보이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친구는 익숙해서 매일을 덤덤하게 걸어갔다고 한다.
언젠가 모친 때문에 가출을 했을 때 친구의 집에서 얹혀 지낸 적이 있었는데,
셔츠에 모친의 립스틱 자국과 얼굴에 피가 묻어서야 그 길이 무섭지 않게 느껴지던 때가 왔다.
친구는 갑자기 뜬금없이 자신이 이 집에 이사오게 된 이유가 엄마가 만나는 어떤 남자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내 대답은 무미건조했고.
3월 13일은 친구의 생일이었고, 그녀는 잠시 본가에 올라왔었다.
그녀는 소식도 없이 내가 다니는 재수학원 앞에 서있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물으니까 내 인스타 게시물 보고 끝나는 시간 맞춰서 찾아왔다고 한다.
그녀의 모친 때문에.
대충 상황은 이러했다.
울산에서 남자친구와 동거 중이던 친구는
생일을 맞아 본가로 돌아왔는데,
그녀의 모친이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고 한다.
자신과 전화를 할 때만큼은 대화를 이어갔으면 좋겠는데, 그것마저 어렵다는 것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거나 화투를 치러 나간다고 한다.
그런 무관심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부모님이 극적으로 정반대라면서 킬킬거렸다.
그러면서 ”둘을 섞을 순 없었을까“라는 터무니없는 상상도 했다.
상상은 터무니없었지만 꽤나 이상적이었다.
친구는 고등학생때 내 부모님을 부러워했고
나 또한 그녀의 부모님이 부러웠었다.
그 시절 또한 우리 둘은 “네 엄마랑 바꾸고 싶어”라는 말을 꽤 자주 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 둘은 외롭다는 면에서 다를게 없었다.
“우리 엄만 그때도 봤겠지만 내가 가출을 하면 가출신고를 하러 가는 사람이고, 24시간 뒤엔 연달아서 실종신고를 해. 화장실을 다녀온 3분 사이에 부재중 전화 4통이 와있고, 영화를 보러 가면 부재중이 40통이 와있어.“
“나는 집나가도 찾지도 않아. 도로 들어가면 혼자 어디 놀러나갔거나 술마시고 전봇대랑 싸우고 있어…난 왜 아빠만 없는데 엄마도 없는 것 같냐…“
말엔 우스갯소리가 깔려있었지만 자조적인 감정에 더 가까웠다.
우리는 그 이외에도 서로 반항을 해야만 했던 원인에 대해서 토로했다.
친구의 새아빠 이야기, 날 잡으러 친구집에 쳐들어왔던 경찰 이야기 등등
내가 단호하게 “나 먼저 살아야지. 걍 버려.”라고 말했다.
친구가 이런 대답을 했다.
“나는 날 지키는 법을 몰라. 엄마는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어. 그리고 나 보다 엄마를 지켜야했던 상황이 더 많았고. 죄책감때문에 엄마는 못버리겠어. 그래서 난 니가 대단하다고 느꼈어. 너는 어머니를 버리면서 널 지키는 방법을 알고, 할 말을 다 하면서 살고 주관이 뚜렷해. 난 의존도만 높은데. 멘탈도 강하고.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말하고 싶었다.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대상이 없어서 못했다고. 날 지키는 방법을 몰라서 대신 자해를 했었고, 할 말을 하면서 살면 넌 한 대 맞을 때 난 3대를 더 맞았다고.
내가 했던 말은 “나, 생각보다 약해. 많이 약해.”라는 짤막한 한 마디였고, 친구는 그런 내게 “넌 강한 척이라도 잘하잖아.”라고 대답했다.
그거, 그렇지. 내가 제일 잘하는거. 센 척 하는거.
강한척을 잘 하려면 어디가 약한지를 알아야하고,
그걸 알려면 상황에 많이 다쳐봐야했다.
나는 강한 척을 잘 하는 방법 대신 이렇게 말해주었다.
내가 엄마를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어렸을 때 부모로서 해서는 안될 짓을 수차례 몇 년 간 지속했고, 커서 사과할 기회를 줬는데도 엄만 자기보다 좋은 엄마가 어딨냐고 화를 내서였어.
소아 뿐만 아니라 아직 ‘애’인 사람들은 그런 존재야.
몇 년이 지나도 부모를 포기하지 않은 아이들은 부모가 짤막한 사과 한 마디만 해도 그 긴 세월이 풀려.
근데 우리 엄만 이제 늦은 거고,
너희 어머니께선 아직 기회와 가망이 있으신거야.
아동학대를 당하며 자란 아이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공감을 받을 수 없고, 받고 싶어할 수도 없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해주려다 서로가 다치기 때문에.
안식의 공간이어야하는 집은 생의 위협을 느끼고,
그 기형적인 상황과 이중적인 공간에서 살아온 사람이 본인의 마음을 조리있게 표현하기란 무척 어렵다.
그래서 늘 이중적이고 모순된 감정만 갖고 살아가며, 치부로 갖고가야한다.
아무리 친하거나 그 집의 혈연일지라도, 그 집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우린 이것을 기억해야한다.
우린 화목한 가정을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은 우리의 기형적인 가정을 이해해줄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