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행복조각

by 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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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긴 연휴였다. 동네 마실을 다니다 카페에 들어가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문득 오늘 아침 욕실 콘센트가 고장 난 게 생각났다. 연휴 탓에 새 콘센트를 구매할 곳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검색해 보니 다행히 전철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는 다이소가 영업 중이었다. 그곳엔 욕실용 방수 커버 콘센트가 딱 하나 진열되어 있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콘센트를 교체하고 나니 '왜 미리 교체하지 않고 꼭 못쓰게 되고 나서야 움직이는 것일까?'란 생각이 들었다. 평소 게으른 편은 아닌데 이런 건 꼭 미루다가 일이 터지고 나서야 움직이게 된다. 그게 게으른 건가? 어쨌든 휴일에 콘센트를 구할 수 있던 건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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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km를 뛰러 한강에 나가는 날이었다. 날씨 앱을 열었는데 온도는 -3도. 체감온도는 -13도. 무슨 일인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강풍이 불고 있었다. 고민 없이 달리러 나갔다. '와...' 몸이 앞으로 나가질 않는다. 5분 정도 뛰었는데 바람이 더 강해졌다. 이대로 집에 갈까 하다 애써 낸 시간이 아까워 조금만 더 달려보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날씨에 20km는 내게 무리였다. 4km를 달렸다고 시계에서 알람이 울렸다. 손목에 진동이 느껴지자마자 미련 없이 뒤를 돌아 달렸다. 앞을 막던 바람이 이제는 뒤에서 나를 밀어주자, 러닝이 편안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달릴 걸 그랬나?'라며 의미 없는 생각을 한다. 인간의 마음이란 게 이토록 간사하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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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의 사투를 벌였던 이틀 후 와이프와 친한 동생과 함께 다시 한강에서 러닝을 했다. 이날은 두 사람에겐 특별한 날이었다. 동생과 와이프는 그때까지 10km를 달려본 적이 없었고, 장거리를 1km당 6분 미만으로(스피드) 달려본 경험 역시 없었다. 내 역할은 페이스메이커. 10km 러닝을 마친 후 평균 페이스를 보니 1km당 5분 54초가 기록되어 있었다. 10km를 처음 달리는 사람이 이 정도 속도로 달린다는 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일이다. 시속 약 10km가 넘는 속도로 59분 동안 쉬지 않고 달린 것이니까. 그럼에도 이들은 열심히, 즐겁게 잘 따라와 줬다. 러닝을 마친 후 무척 기뻐하는 두 사람을 보니 누군가의 행복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단 생각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엔 두 사람이 15km 달릴 수 있게 하는 게 목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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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았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공중화장실 청소부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정돈하고, 수염을 다듬고, 항상 같은 곳에 놔둔 차 열쇠와 지갑과 동전을 챙긴 후 문을 열고 나가 집 앞에 있는 음료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차에 시동을 걸기 전 캔 커피를 마신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 그는 차 안에서 언제나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는데, 나는 바로 이 '카세트테이프'에 꽂히고 말았다. 어릴 때 사 모았던 카세트테이프.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여기에 녹음을 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의식의 흐름은 중고장터에서 카세트 플레이어를 찾게 만들었다. 내가 사용했던 모델은 아니었지만, 왠지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이 써봤을 법한 아이를 골라 흥정을 했다. 5천 원을 깎아 구매한 카세트 플레이어가 도착하자 편의점으로 달려가 AAA사이즈 배터리를 사고, 부모님 댁 창고에 있던 테이프를 찾아 플레이어에 넣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노이즈 가득한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깨끗하지 않은 이 소리에서 묘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단 건, 연식 오래된 카세트 플레이어만큼이나 나도 연식이 꽤 흘렀단 뜻이 아닐까? 그럼 어때? 기분만 좋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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