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기
일본 여행을 계획하며 교토에 가기로 결정한 핵심적인 이유는 바로 아라시야마, 후시미이나리, 금각사, 은각사, 철학의 길 같은 장소 때문이다. 나는 어느 나라를 가든 그 나라의 전통 문화와 현대 문화를 동시에 경험하고 싶어 하기에 일본의 전통 문화 흔적을 느껴보기 위해서라도 교토는 필수로 방문해야 하는 도시였다. 교토에 대한 첫 이야기를 들었던 때는 2012년쯤이다. 친구들이 일본으로 여행을 자주 다니며 특히 교토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해줬고, 일본 여행 사진집이나 에세이를 읽을 때도 교토라는 도시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 일본 갈래?"라고 물어준 동생 또한 임경선 작가의 에세이 <교토에 다녀왔습니다>를 읽고 교토를 일본 여행의 첫 도시로 정했다.
임경선 작가는 <교토에 다녀왔습니다>에서 "도쿄가 감각의 도시라면 교토는 정서의 도시였습니다."라고 표현하면서 "살아가면서 생각의 중심을 놓칠때, 내가 나답지 않다고 느낄때,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을때, 마음을 비워낼 필요가 있을때, 왠지 이곳 교토가 무척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라고 고백한다. 도쿄와 교토를 감각의 도시, 정서의 도시로 각각 표현한 것을 보며 머릿속에 느낌표가 떴다. 그리고 임경선 작가가 왜 중심을 놓칠때, 마음을 비워내야할때 교토가 그리울 것 같은지도 알 것 같았다. 오랜 시간 제자리를 지켜온 교토의 거리, 강물, 나무, 상점, 신사들을 보며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중심을 지키며 초심을 잃지 않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구나 느꼈다.
교토에 직접 가기 전까지는 천년 이상 일본의 수도 역할을 한 도시, 때문에 도시 중심에서 일본의 전통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 볼거리가 많은 곳 정도로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그중 천년의 수도라는 수식어는 웅장한 서사를 품고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교토에 다녀온 사람들이 교토의 매력으로 꼽는 것은 오래된 목조 저택이 줄지어 있는 좁은 거리, 안개 낀 강을 따라 걷던 산책길,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노포, 단풍으로 물든 풍경 같은 것들이었다. 웅장하다기보다는 소박한 순간들이다. 내 눈에 직접 담은 교토의 모습 역시 그랬다. 길게 뻗은 골목, 이끼 낀 돌담, 고요한 강둑, 허리가 두꺼운 나무, 오래된 상점, 녹슨 신호등 같은 것들을 보며 내 안에서 이미 알고 있지만 하나의 언어로만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지금 그때의 감정을 다시 불러와서 가다듬어본다면 '그리움'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시간의 층이 켜켜이 쌓여 무게감 있게 존재하고 있지만 위압감은 없고,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던 건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뿌리가 깊어 보이고,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어 기댈 수 있는. 그런 거리, 강물, 나무, 상점, 신사, 바람, 하늘, 땅. 보자마자 이미 그리운 것들.
땅값을 올리려고, 건물을 지으려고 주변을 파괴하고 더 크게, 더 넓게 개발만 일삼는 도시에서 살다 보면 하루가 다르게 주변 풍경이 바뀌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반백년을 운영하던 가게는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흔적도 없이 밀려나고, 나이 든 나무도 쉽게 베인다. 나는 오래된 것들, 낡은 것들, 서사가 쌓여있는 것들을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이다. 시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교토를 걸으며 이제는 사라진 것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프고, 부럽고, 그리웠다.
확실히 교토를 일본의 첫인상으로 결정한 건 잘한 일이다. 특히 새해가 시작되는 첫 주의 교토 여행이라서 꼭 신사에 방문하고 싶었다. 신사 방문이야 어느 때고 할 수 있지만 새해의 신사라니. 좀 더 생생하고 뜻깊은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컸다. 교토에는 수백 개의 사찰과 신사가 있다. 우지가미 신사, 야사카 신사, 히라노 신사 등 아름다운 곳들이 많지만 짧은 일정 동안 모든 곳을 방문할 수는 없었기에 몇 군데를 우선 결정했다. 그중 첫 번째 방문지가 후시미이나리다.
1월 3일 날이 밝고, 장어덮밥으로 배를 든든히 채운 뒤 후시미이나리로 향했다. 신사에 가기 전에 밥 먹길 매우 잘했다! 후시미이나리는 넓고 볼 게 많아서 한참을 걸었다. 밥을 안 먹고 갔으면 배고파서 헐레벌떡 둘러보고 떠났을 것 같다. 후시미이나리 가기 전 방문했던 장어덮밥 맛집은 나중에 일본 여행 맛집 방문기 포스팅에서 공유하겠다.
신사 입구에서 신년 운세 뽑기를 하고 있었다. 뽑기 통을 흔들면 랜덤으로 막대기 하나가 나오는데 그 끝에 적힌 숫자를 신녀에게 말해주면 운세 종이를 건네준다. 내가 뽑은 번호는 18번, 운세 뽑기 비용은 200엔이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운세 종이를 들고 읽는 모습이 귀여웠다. 만약 좋지 않은 운세를 뽑았을 땐 액운을 묶는 기둥에 운세 종이를 묶어두고 오면 된다.
후시미이나리는 재물운과 관련된 신을 모시는 신사라고 한다. 후시미이나리는 여우 신사라고도 불리는데 일본에서는 여우가 풍요와 부의 상징이다. 신사 입구에서부터 여우 동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곳곳마다 여우를 볼 수 있었다. 후시미이나리를 상징하는 요소로 여우 외에도 수천 개의 붉은 기둥이 줄지어 서있는 장관을 빼놓을 수 없다. 도리이(とりい)라고 불리는 붉은 기둥은 현실 세계와 신성한 장소인 신사의 경계를 의미하는 관문이다. 재물운을 다루는 신사인 후시미이나리에서 참배를 하고 소원이 이뤄진 사람들이 감사의 의미로 신사에 도리이를 기부했고, 붉은 기둥의 길이 만들어지며 주요 관광지로 형성됐다. 또한 후시미이나리는 영화 게이샤의 추억을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주인공 치요가 와타나베 회장을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며 게이샤가 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비는 장소로 나왔다.
후시미이나리 중간 영역까지만 와도 곳곳에 설치된 작은 신당들과 소형 도리이를 많이 볼 수 있다. 대형 도리이는 얼마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작은 도리이는 5,000엔에 판매하고 있어서 개인도 부담 없이 구매 가능하다. 도리이의 앞면은 아무 글자도 없지만 뒷면에는 기부자의 이름이 쓰여있다. 나도 나중에 도리이를 기부하며 내 이름을 한글로 새기면 어떨까 생각했다.
후시미이나리는 신사이니 여기저기 참배하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참배할 때는 동전을 내고, 종을 울리고, 고개 숙여 인사를 두 번 하고, 손뼉도 두 번 친 뒤에 소원을 빌고, 마지막으로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종을 울리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신에게 내가 왔음을 알리는 의미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이 참배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따라서 서너 번 참배를 했다.
신사 한 바퀴를 다 둘러보고 내려가는 길에도 참배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인센스 스틱 1개 묶음에 50엔이다. 기도에 기도를 더하면 소원이 더 잘 이뤄질까? 후시미이나리를 떠나기 직전 마지막까지도 향을 태우며 기도를 올렸다. 저와 가족들, 친구들 모두 돈 잘 벌게 해주세요…! 진짜 진지하게 빌었다... 부적도 샀다...
후시미이나리를 방문했던 후기들을 보면 신사를 다 둘러보는데 1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쓰여있었지만 내가 머물렀던 시간은 3시간이었다. 도리이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풍경을 감상하고, 참배도 드리고, 곳곳에 있는 작은 신당들도 구경하고, 기념품 가게도 둘러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평소에도 방문객이 많은 곳이지만 새해라서 그런지 훨씬 더 많은 인파가 몰렸다. 한적할 때 방문하면 감상에 더 도움이 되겠지만 새해 특유의 북적북적 활기찬 기운이 가득해 그것 나름대로 좋았다.
후시미이나리의 여우 동상, 도리이, 돌담, 비석, 신당, 향초, 나무, 바람, 하늘 모두 멋있었고 뜻깊은 추억이 되었다. 새해에 방문하길 참 잘했다. 그곳에서 기도한 소원들이 2024년에 이뤄진다면 다음에 방문할 땐 내 이름을 새긴 도리이를 기부하고 싶다. 교토의 오래된 것들 사이에서 같이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낡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