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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통 Feb 10. 2024

모래, 달빛, 연못, 이끼의 시간 은각사

일본 여행기

Ginkakuji 또는 지쇼지(慈照寺)라고 불리는 은각사. 일본 정원의 정수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정원이다. 리을(ㄹ)자 모양 진입로에 들어서면 감탄을 자아내는 은각사 정원의 상징이 보인다. 하얀 모래로 정갈하고 반듯하게 쌓아 올린 긴샤단(銀沙灘)과 코게츠다이(向月台)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긴샤단은 바다의 파도를 형상화해 만들었고, 코게츠다이는 후지산의 모양을 본땄다고 한다. 코게츠다이의 바닥 직경은 3.2m, 높이는 1.7m이다. 하얀 모래산에 달빛을 비춰 감상하기 위해서 쌓았다고도 하고, 모래산에 반사되는 달빛으로 은각사의 불당을 비추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은각사는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자신을 위한 곳으로 건축했으나 요시마사는 은각사의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고 그의 유언에 따라 사찰이 되었다.


달빛을 품은 모래 후지산 코게츠다이(向月台)
은각사의 파도 긴샤단(銀沙灘), 그 뒤로 요시마사의 불당이 보인다.
일본 조경의 핵심 소재 모래


은각사는 금각사와 비교하며 많이 언급되는데 금각사가 지어진 이후 그를 따라 은각사가 지어졌기 때문이다. 금각사는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할아버지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세운 사원이다. 화려한 금박 장식의 사원으로 유명하다. 은각사 역시 은으로 장식하려고 했으나 예산 부족으로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다. 비록 은각사가 금각사의 화려함에 비해서는 수수한 모습이지만 은각사를 둘러싼 정원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고, 오히려 금각사보다 은각사를 더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짧은 일정 때문에 은각사, 금각사 두 군데 중 한 군데만 가야 한다면 어디를 가는 게 좋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금각사의 눈이 부시는 금박 장식보다는 초록 정원의 산책로를 걸으며 차분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은각사를 택했다. 장소가 주는 차분한 분위기에 따라 사람들이 조용히 질서 있게 정원을 거닐며 그 시간을 음미하고 있어서 참 좋았다. 교토에 다시 간다면 은각사의 다른 계절을 보러 또 방문할 것 같다.


수수하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은각사


은각사의 초록 정원은 이끼와 소나무, 연못의 조화로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방문한 계절이 겨울이라서 소나무 외에는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이었지만 이끼와 소나무의 초록과 파란 하늘 덕분에 결코 눈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봄에는 은각사에도 꽃이 필까? 여름에는 초록이 더욱 짙을 것 같고, 가을은 단풍으로 울긋불긋해질 것 같고, 겨울에는 함박눈이 내리면 하얗게 뒤덮여 시린 아름다움을 보여줄 것 같다. 은각사에 오기 전에 후시미이나리, 아라시야마, 기요미즈데라를 방문했지만 계절마다 찾고 싶은 곳을 하나만 꼽자면 은각사다. 은각사를 보고 난 뒤 일본 정원의 미를 뽐내는 다른 사찰들도 찾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은각사 정원 어디를 찍어도 예쁘다


정원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한 바퀴 걷다 보면 전망대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보인다. 따라 올라가면 현대 도시의 얼굴을 배경으로 고고하게 숨 쉬고 있는 은각사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잠시 멈춰 서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아!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시는 빠르게 바뀌었지만 이 사찰만은 변하지 않고 그 시간을 지나왔다는 사실을 어떤 장면처럼 상상해 보니 살짝 아찔한 기분이 들면서 뭉클했다.


"길게 뻗은 골목, 이끼 낀 돌담, 고요한 강둑, 허리가 두꺼운 나무, 오래된 상점, 녹슨 신호등 같은 것들을 보며 내 안에서 이미 알고 있지만 하나의 언어로만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지금 그때의 감정을 다시 불러와서 가다듬어본다면 '그리움'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시간의 층이 켜켜이 쌓여 무게감 있게 존재하고 있지만 위압감은 없고,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던 건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뿌리가 깊어 보이고,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어 기댈 수 있는. 그런 거리, 강물, 나무, 상점, 신사, 바람, 하늘, 땅. 보자마자 이미 그리운 것들. 땅값을 올리려고, 건물을 지으려고 주변을 파괴하고 더 크게, 더 넓게 개발만 일삼는 도시에서 살다 보면 하루가 다르게 주변 풍경이 바뀌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반백년을 운영하던 가게는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흔적도 없이 밀려나고, 나이 든 나무도 쉽게 베인다. 나는 오래된 것들, 낡은 것들, 서사가 쌓여있는 것들을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이다. 시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교토를 걸으며 이제는 사라진 것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프고, 부럽고, 그리웠다."


<여우가 지키고 있는 후시미이나리> 편에 작성한 글이다. 교토 여행을 되돌아보면서 가장 그리운 순간은 세월이 고스란히 쌓여있는 곳들에서 보낸 시간이다. 오래된 것들, 낡은 것들, 서사가 쌓여있는 것들을 보며 마음이 정갈하게 닦이는 기분이 좋았다. 어렸을 때는 북적이고, 쾌활하고, 자극적인 도시의 문화를 만끽하며 에피소드가 끊이지 않는 스타일의 여행을 했는데 나이가 조금 들고나니 나를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여행이 좋아졌다. 그런 면에서 이번 교토 여행은 엄청 만족스러웠다. 역시 오래된 것들은 힘이 있다.


은각사와 도시의 풍경이 대비되어 더 감동이었던 모습.


은각사에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다음 일정 때문에 발길을 돌렸다. 떠나오는 길이 아쉬웠다. 아쉬운 이별은 다음을 기약하곤 한다. 글의 마무리는 철학의 길에서 찍었던 사진 몇 장이다. 은각사에 가는 길에 철학의 길도 걸었는데 두 장소의 연단 코스가 참 마음에 들었다. 다음에는 철학의 길 주변에 숙소를 구해서 이 동네에서 머물러 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관광 계획은 없이 철학의 길과 은각사 정원을 걷고, 생각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맛있는 커피로 목도 축이고. 상상만 해봐도 좋다.


철학의 길 풍경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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