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기대와 희망으로 쌓은 성이 예기치 않은 파도 앞에서 사라지기까지
한국에 있을 때 명절마다 열 시간 넘게 운전해서 도착했던 외갓집. 그 문을 열면 펼쳐지던 남해 미조항의 아기자기함과 정겨움을 기억한다. 이민 오기 전에 살았던 경기도 파주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그곳에서는 썰물이 되면 나만의 환상적인 놀이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닷물이 걷히고 드러난 바윗돌은 게와 해삼을 잡는 완벽한 사냥터였고, 나는 몇 시간이고 돌을 뒤적이며 고동도 잡고 홍합과 따개비를 잡아 뜯으며 자연의 경이로움에 푹 빠져 지내곤 했다. 사촌 오빠들이 바로 잡은 복어를 시멘트에 벅벅 문지르면 배가 한껏 불룩해지는 것을 보고 마냥 신기해하던, 뭍에서 온 순수한 시골 아이였다.
1991년 가을,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민 온 후, Redondo Beach(레돈도 해변)의 끝없이 펼쳐진 넓은 모래사장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감탄도 잊을 수가 없다. 이 해변은 원대한 꿈을 펼칠 수 있는 백지 같은 공간으로 느껴졌고 곧, 나의 새로운 캔버스가 되었다. 벅찬 설렘 속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막 싹트기 시작한 건축가적 재능을 한껏 발휘하여 모래성을 쌓는 것이었다. 나만의 대담한 구상을 마음속에 품고, 모래가 많이 필요할 것이라 확신하며 깊은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파도로부터 나의 요새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저 머리로만 계획한 것이 아니라 완벽한 것으로 확신하며 자부심과 당당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썰물에 대한 나의 얕은 지식으로는 축축한 모래가 아주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바다가 처음으로 닿는 곳으로부터는 안전한, 그야말로 완벽한 지점을 골랐다고 생각했다.
단단히 다진 기초 위에 나의 모래성은 점차 그럴싸한 모습을 갖춰 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디즈니랜드의 성보다 더 멋질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선언했다. 특별한 도구 같은 건 없었지만, 맨손으로 모래를 정성껏 다지고, 손가락으로 좀 더 섬세한 모양을 조각하며, 나만의 걸작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작업에 푹 빠져들었던 나는 이 성이 영원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거라 상상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정말 멋진 광경이 될 것이라고. 그 생각만으로도 내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얼굴에는 진지한 작업을 할 때면 늘 그렇듯 익숙한 미간의 주름이 자리했다.
바로 그때였다. 막 마지막 손질하고 있을 때, 일이 터지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폭풍 때문이 아니었다. 긴 오후가 지나고 밀물이 서서히 밀려드는, 조용하지만 피할 수 없는 조수의 흐름이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새에 파도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파도가 부서지는 순간까지도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한순간에 견고한 바닥부터 가장 높은 탑까지, 내가 공들여 쌓아 올렸던 모든 에너지와 정성이 담긴 모래성은 속절없이 무너져 사라졌다. 그 순간의 쓰라림, 그 완벽한 무력감은 너무나도 깊어서 나는 그 이후로 다시는 모래성을 쌓지 않았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것은, 그저 모래사장 자체가 주는 소박한 기쁨마저 함께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순간이 내 인생 전반에 걸쳐 메아리칠, 고통스러운 초기 교훈이 되었다. 그것은 아무리 세심하고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쌓아 올렸더라도, 때로는 조수가 바뀌듯이 모든 것이 통제 불가능한 힘에 의해 휩쓸려 사라질 수 있다는 아픈 진실이었다. 너무 공을 들이면 그것이 무너졌을 때의 실망감이 배가 된다는 것을 모래성 쌓기 놀이를 통해 너무 일찍 알아버린 걸까? 그런 이른 경험은 일종의 조용한 예고편처럼, 이후 내가 좀 더 공식적인 제도권 안에서 여러 가지 시스템을 접하는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반복되곤 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제도’라는 것을 접한 것은 내가 여덟 살 때 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했을 때였다. 백인 학생이 대부분인 동네에 있던 첫 학교는 나 같은 이민자 아이들에게 거의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생각보다 아주 힘들었던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완전히 소외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영어로 의사소통하거나 나 자신을 방어할 수 없었기에, 무력감과 패배감에 젖어 집으로 돌아와 펑펑 울곤 했다.
그때의 감정을 뼛속 깊이 새겨 넣은 한 사건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교실 벽에는 각자의 작은 봉투가 걸려 있었는데, 우리는 점심시간까지 그곳에 점심값을 넣어 두었다. 어느 날, 두 남자아이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 봉투에서 점심값을 꺼내 갔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내가 영어가 서툴러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선생님께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언어를 배우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과제처럼 느껴졌고, 그 이민 초창기에 예측할 수 없었던 불안한 날들은 내가 겪었던 가장 힘든 시간 중 하나였다.
상황은 급변했다. 부모님께서 교회에서 운전과 교회 건물 관리 업무를 맡게 되시면서, 우리는 로스앤젤레스의 ‘실버 레이크(Silver Lake)라는 지역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곳도 한인타운과는 꽤 멀리 떨어진 저소득층이 많은 지역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새로 전학 간 초등학교인 Micheltorena Street Elementary School에서는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나처럼 이민자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곧바로 ESL(영어 집중 교육) 수업에 배정되었다. 그곳에서 비로소 나는 간절히 필요했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apple’이라는 단어가 첫 페이지에 실려 있던 조그마한 단어장을 아직도 기억한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게 되었고 자신감 있게 정규 수업에 합류할 수 있었다. 배움의 진정한 즐거움을 일깨워 주신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난 것도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 초등학교 시절은 정말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가득하다. 친구들을 사귀고 자신감을 얻으며, 나는 비로소 활기 넘치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는 학생 대표로 졸업 연설을 맡아 읽게 될 만큼, 나의 존재감과 리더십까지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공교육 시스템에 나는 여전히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다. 그렇게 얻은 초등학교에서의 작은 성공은 내 인생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고, 결국 ‘벤 나이스 중학교 수학 및 과학 영재 프로그램(Van Nuys Middle School Math and Science Magnet)’에 합격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했다.
Van Nuys 중학교 생활은 완전히 색다른 환경이었고 그곳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습득하는 것이 단순히 ‘권장’되는 수준을 넘어 ‘당연시’되는 환경 속에 들어섰다. 나는 기꺼이 그 도전에 응하게 되었고 영재 교육(GATE)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중학교 3년 내내 모든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초등학교 때의 성과가 좀 더 공고해지던 시기에, 나는 어느덧 또다시 졸업생 대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나의 중학교 졸업사의 제목은 “We Are Our Choices.”였다. 의역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들의 결과물이다.’라는 뜻이다. 그 메시지의 정신에 충실하게도, 내가 그 시절 내린 선택들과 쏟았던 모든 노력은 그야말로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연단에 서서 나는 눈에 보이는 성취뿐만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지에 대한 깊은 자부심을 느꼈다. 나의 중학교 시절은 올바른 지원과 좋은 교육 시스템의 체계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 나는 자신감과 유능함을 만끽하며 더 큰 도전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런 기세를 몰아, 나는 경쟁이 한껏 더 치열한 ‘벤 나이스 고등학교 의료 영재 프로그램(Van Nuys High School Medical Magnet Program)’에 지원했고,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가슴 벅찼다.
의료 영재 프로그램은 학업적 우수성과 끊임없는 성취를 지향하는 엄격한 교육 과정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 입학 경쟁이 매우 치열한 상황에서 학업 외적인 역량을 입증하기 위해 지역 병원에서의 자원봉사와 다양한 특별활동을 쌓아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감이 있었다. 제대로 된 안내 없이는 자주 길을 잃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그래도 나는 가능한 한 최고로 높은 수준의 수업들을 소화하면서도 최대한 많은 과외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결정한 모든 선택 과목, 모든 특별활동, 그리고 모든 AP(Advanced Placement) 과목들은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신중하게 선택되고 계획되었다. 바로 ‘최고 수준의 대학 합격’이라는 목표뿐이었다.
이후 JROTC(주니어 학군단) 활동에 몰두하며 이러한 포부를 더욱 키워 나갔다. 나는 소령 계급까지 올랐고, 대대 전체의 이인자 격인 대대 행정 장교를 맡기도 했다. 처음에는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에 큰 뜻을 두기도 했으니, 리더십과 봉사에 대한 나의 헌신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하다. 안타깝게도 미국 시민권 취득이 늦어지며 그 꿈은 접어야 했지만, 여전히 최상위 대학을 염두에 두고 JROTC 활동을 하는 것 외에도 태권도 대회에 참가했고, 친구들의 학업을 돕는 도우미 역할도 도맡아 했다. 경험의 폭을 넓히고자 지역 자동차 정비소에서 보험 청구 업무를 담당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고,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소통과 문제해결 능력을 익히기도 했다. 또한 교회에서는 청년부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고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이렇듯 매사에 헌신적으로 임했기에 어떤 일이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학업에 열정을 쏟아부었고, 교과서를 탐독했으며, 경쟁적인 환경 속에서도 즐거움을 느꼈다. 학업과 학업 외 활동 모두에 대한 헌신과 노력, 모든 AP 학점과 힘들게 얻은 좋은 성적들이 더 현명하고 효율적인 대학 생활을 위한 든든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Honors와 AP 같은 심화 과목이 주는 매력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것들은 단순히 지식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확실한 이점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 과목들을 통해 내가 준비된 학생임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고, 일반 수업을 뛰어넘는 도전을 경험하며, 무엇보다 대학 기초 과정을 건너뛰고 더 전문적이고 수준 높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남들보다 더 많이 앞서 나가고자 하는 생각은 내 마음속에 깊게 자리한, 어쩌면 나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면의 강렬한 동기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만 여덟 살이던 해 늦가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지 않고 미국에 왔기에 나는 3학년으로 건너뛰지 않고 2학년을 한 번 더 다녀야 했다. 그렇게 해서 본의 아니게 또래 친구들보다 한살이 많아지게 되었고, 늦어진 진학 시기를 홀로 늘 마음에 걸림돌로 여겨 왔다. 그랬기에 대학에 가서 남들보다 1, 2년을 앞질러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더 많은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는 아마, 남을 앞지르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잃어버린 시간을 따라잡기 위한 순수한 열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개인적인 동기는 심화 과목 이수가 대학 준비의 필수 코스라고 강력히 주장하던 당시의 교육적 조언과 맞아떨어졌고, 더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한 방편임과 동시에 시간도 아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에 더더욱 온 마음을 다해 받아들인 것 같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내가 애써 쌓아 올렸던 그 기대감은 생각만큼 거창한 성공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지만 김 빠지는 대화 속에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처음 대학 상담 선생님을 만났을 때, 설레는 마음으로 새내기 수강 과목을 이야기하며 나는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까지 합격했던 AP 생물학 점수를 내밀었다. 나는 취득한 AP 성적으로 기초 생물학 과정은 건너뛰고 곧바로 2학년 수준의 과목을 수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상담 선생님의 반응은 내가 예상과 거리가 멀었다. 대신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넌 지금 생물학 전공을 고려한다고 하는데, 기초 과정을 정말로 건너뛰고 싶지는 않겠지?”
일 년 내내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까지 보고, 대학 학점으로 인정된다는 공식 성적표를 손에 쥐었는데도, 어드바이저는 내내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거듭 물었다.
“생물학 101 과정을 굳이 시험 점수로 크레디트(credit) 처리하고 다음 과정으로 건너뛰면 무척이나 어려운 과목을 듣게 될 텐데, 고등학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려워지는 2학년 과목을 바로 들을 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건가? 거기서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까?”
그녀의 말투는 마치 위험한 도박에 전 재산을 걸기 직전인 사람을 압박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갈 기초가 충분한지 확인하기 위해 안전하게 복습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니?”
그 순간, 모든 것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던 모든 것, 이전에 쌓아 올렸던 지식에 대한 모든 자신감이 그녀의 질문 아래서 작아지는 듯했다. 나는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나의 능력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AP 시험에 합격했으면서도,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이 작아지고 마치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전의 성취가 어딘가 불완전하다는 생각이 스치며, 그 암시가 나를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골적인 거절은 아니었지만, 교묘한 압박이었고 결국 내가 어렵게 얻은 학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강요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지못해 나는 생물학 101을 다시 듣겠다고 동의해 버렸다. 이는 대학 신입생 생활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일어난, 결정적이고 깊은 실망감을 안겨준 경험이었다. 내가 현장에서 접하게 된 현실은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오히려 대학 1학년 생활 대부분은 고등학교 때 배운 내용을 반복하는 것 같아 답답했다. 이미 대학 학점을 많이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몇 달 전에 이미 숙달했던 똑같은 내용을 다루는 강의실에 앉아 있어야 했다. 달라진 것이라면 고등학교 수업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강의실에서 수백 명과 함께 집중하려 애써야 했다는 것뿐이었다. 때로는 내가 배운 교과서와 다른 내용이나 다른 접근 방식을 배우기도 했지만, 핵심 개념과 기본적인 지식은 똑같았다. 진심으로 좌절감을 느꼈고, 시간과 노력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무료로 공교육을 통해 다 배운 것을 이젠 수만 달러의 학비를 내고 또 듣고 있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격분할 정도였다. 나는 끊임없이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사교 활동은 포기했으며, 나를 전진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과목을 공부하느라 온 힘을 다했는데, 결국 제자리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효율적인 교육을 위한 황금 티켓이라고 여겼던 나의 모든 노력은 환상이었다.
‘더 나은 방법이 분명 있을 거야.’라고 애써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러한 경험은 내가 고등 교육을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은 길’을 기어이 찾아내겠다는 내면의 조용하지만 단호한 결심을 하게 했다. 그것이 바로 훗날 CAL Prep의 첫 씨앗이 되었다. 나는 학생들이 가진 능력과 노력을 진정으로 존중하며, 정직하고 효율적인 길을 열어 주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품게 되었다. 노력의 배신처럼 느껴졌던 나의 경험은 다른 학생들이 나와 같은 학업적 정체를 겪지 않도록 하는 설계도가 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