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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DA Jul 31. 2020

이 편이 훨씬 수월하거든요

"나다워야 한다"는 말에 대하여


    “넌 너 자신일 때 가장 아름다워”라든지, “본연의 모습을 사랑하세요”라든지, 하다못해 유튜브 댓글창에 뜬 “Love yourself ;)”라든지, 세상의 모든 격언이 자신의 솔직한 모습 그대로를 찬양하고 이를 사랑하라고 이른다. 엇나간 친구의 멱살을 붙잡고 “너답지 않게 왜 그래?”라며 다그치는 드라마 주인공의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살아라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나답게 사는 건 의심의 여지없는 진리처럼 여겨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세상 속에 푹 절여진 나는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걸까? 당연히 본연의 나 그대로를 긍정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낙오된 사람이 된 기분을 종종 느꼈다.


    단 한순간도 나다우면 안 됐다. 왜냐면 나는 툭하면 넘어져서 7살이 될 때까지 빨간 무릎보호대를 차고 다녀야 했을 만큼 운동신경이 꽝이고, 한 번 마음먹은 건 잘 고치지도 않는 고집쟁이에, 기억도 안 날 아득한 유년시절이 아니고서는 정상 체중이었던 적이 없는 결함 투성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스스로의 모습을 직시하고 긍정하라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애써 무시하고 있었던 나의 결함 목록을 재차 정독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항상 현실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으로 고통을 잠재웠다. 기나긴 결함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가면 그 끝에 있을 이상적인 나의 모습을 그렸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서는 그게 진짜 나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행복해지겠거니 하는 망상으로 지새웠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적인 ‘나’의 날 선 말들이 생생히 들리기 시작했다. 간절한 기도 끝에 조각상에 생명이 깃들게 했다는 피그말리온처럼 거듭된 망상이 또 다른 ‘나’에게 목소리를 부여한 것이다. 다만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를 얻어 완벽해졌다면, 나는 ‘나’를 얻음으로써 영구히 결핍의 세계로 밀려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마음속에 자라난 새로운 존재에 ‘이지(easy)’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쉽게 쉽게 살자는 바람을 담은 그 별명에도 불구하고 ‘이지’는 항상 나에게 잔소리를 해댔다. “그 상황에선 이렇게 했어야지.”, “그렇게 행동하지 말았어야지.”, “좀 더 올바른 선택을 내렸어야지.”, 마치 완벽한 나, ‘이지’처럼. ‘이지’와의 비교 속에서 나 자신은 항상 이상에서 미끄러진, 어딘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스스로가 누군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가 쟁취해야만 할 ‘이지’만을 바라보는 데 열중했다. 진짜 내 모습을 직시하는 건 아주 가끔씩이었는데, 그것도 오직 결점이 얼마나 가려졌는지 확인하기 위한 필요 최소한의 정도로만 이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 누구보다도 나다운 나를 가장 혐오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이지’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졌는지 모르겠다. 거짓말이다. 안다. 조금도 다가가지 못했다. 아직도 2단 줄넘기 하나 못 넘기고, 공을 발로 차면 영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나간다. 최대한 타인과 함께 하는 삶을 익히려 해도 마음속 강 씨 고집은 꺾일 줄을 모른다. 외모는? 말해 무엇하겠나. 그 외에도 평생을 바쳐도 메꾸지 못할 간극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오들은 늘어났고 그만큼 나는 ‘이지’로부터 영구히 격리되고야 말았다. 이렇게 되어먹은 것은 바꿀 수가 없더라는 탄식이 이어지고 나니 아픔만이 남았다. 원하는 걸 모두 얻을 순 없다는 풋내기의 좌절에서 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여태껏 스스로를 부정하며 쌓아둔 게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내가 싫어 죽겠는데 어떻게 계속 살 엄두가 날까.


    어떻게 내가 ‘이지’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냥 나다. 그걸 인정해야 할 때가 온듯하다. 돌연 태도를 바꾼 것은 별달리 진리를 깨달아서가 아니다. 그저 덜 아프게 살고자 버둥거리는 몸부림일 뿐이다. 나의 삶에는 비상 탈출 버튼이 없다. 교환 또는 환불 서비스 없이 평생 이 몸과 이 정신머리로 그럭저럭 살아내야 한다면, 익혀왔던 전략을 바꾸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스스로를 긍정하며 살라는 격언들은 그게 옳기 때문이라기보다 실상 그게 사는 데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 편히 나를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다 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아직 남아있는 마음속의 잔재들을 어르면서 말이다.


    내가 자기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도록 스스로 허락하고 나서야 나답게 살기가 시작되었다. 근데 나를 나답게 하는 방법은 그게 전부인 듯도 하다. 어떤 고정된 물체나 기억이 나를 나답게 해 줄 수 없다는 말이다. 분명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하나의 물건이, 또는 한 명의 사람이, 찰나의 사건이 곧 나를 나답게 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의 나와 몇 년 후의 나는 같으면서도 다른 점도 많을 것이다. 세상의 맥락 역시 변할 테다. 모든 게 바뀐 이후에도 그것들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한 때는 소중했던 무언가와 거기에 엮인 나의 모습에 집착하다 또 다른 ‘이지’를 불러오고야 말지는 않을까? 


    나는 항상 나답다. 설사 과거보다 못하더라도 그 모습을 부정할 필요 없다. 그래도 나다. 정해진 트랙 위에 완벽한 ‘이지’를 뒤쫓는 2등 주자로서의 내가 아니라, 발을 내딛는 곳이 새로이 길이 되는 무궁한 초원을 달린다는 감각으로 나는 항상 스스로를 응원하려고 한다. 적어도 주어진 이 삶에 한해서는 그게 답이 아닐까 싶다. 살아보니 이 편이 훨씬 수월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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