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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DA May 18. 2020

맛있는 차 한 잔

200515_회사작당

    요즘 오디오북 듣는 재미에 빠져있다. 내용에 귀를 기울이든 아니든 각기 즐거움이 있다. 낭독자가 적절한 속도로 읊어주는 글귀는 하루를 때우는 배경음이 되기도 하고, 읽어야지 미루다가 끝내 잊히고 만 책을 겨우 접하게 되는 귀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청각으로 텍스트를 접한다는 개념을 받아들이니 꽤 신선한 경험이 지속되고 있다.


    하루는 우연히 눌러본 오디오북 시리즈에서 절로 흥미가 생기는 제목을 발견했다. ‘맛있는 차 한 잔(A Nice Cup of Tea)’. 조지 오웰이 1946년 발표한 에세이로, 제목에서 곧장 알 수 있듯이 맛있는 차를 우리기 위한 저자의 여러 원칙들을 풀어서 설명한 글이다. 비록 원고지 20장 정도의 짧은 에세이지만 전후 배급제로 살아가는 녹록잖은 현실을 반영한 글귀나 여전히 두 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는 ‘우유 먼저, 차 먼저’ 논쟁에 대한 그의 확신 등을 발견할 수 있어 유쾌한 작품이었다. 게다가 내가 발견한 이 오디오 클립은 가수 이승렬의 낭독으로 채워진 것으로, 그의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에세이 내용과 적절히 어우러져 설득력 또한 좋았다.


    오웰이 알려주는 맛있는 차 한 잔 우리는 법이란 다음과 같다:

    1. 인도나 스리랑카 찻잎으로 우릴 것

    2. 한 번에 마실 만큼만 우릴 것

    3. 찻주전자는 미리 데워둘 것 

    4. 진하게 우릴 것

    5. 찻잎을 주전자에 넣어 우려낼 것

    6. 끓는 물을 바로 부을 수 있게 찻주전자를 냄비 옆에 가져갈 것

    7. 찻잎이 잘 우러나도록 찻주전자를 한 번 흔들어 줄 것

    8. 깊고 큼직한 아침용 컵에 담아 마실 것

    9. 차에 넣을 우유에 떠있는 크림은 미리 걷어낼 것

    10. 찻물 먼저 따르고 그 후에 우유를 첨가할 것

    11. 설탕을 넣지 말 것


    차의 세상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공리부터 당장이라도 반박하고픈 의아한 주장까지, 총 11개로 추려낸 오웰의 차 우리는 요령은 실용적이기 그지없는 내용으로만 차 있다. 이렇게 현실감 넘치는 에세이에는 얼렁뚱땅 차를 우려 마시는 주변 사람들을 당장이라도 구원해내려는 저자의 의지가 엿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덕후는 도무지 사람들을 내버려 둘 수가 없나 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는 다른 사람들도 제대로 즐겨줬으면 하는 선의와 오지랖 그 사이 어딘가를 오웰도 열심히 돌아다녔나 보다. 그래서인지 묘하게 자신만만한 그의 논조가 영 미워보이지만은 않는다.


    저명한 소설가의 삶에 스며든 찻물 얼룩을 보고 있으려니 내게도 몇 가지 요령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맛있는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어떤 게 필요한가. 고민이 짧은 만큼 적어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아래에 있는 것들은 내가 항상 염두에 두려고 노력하는 부분임을 강조하고 싶다.


    <맛있는 차 한 잔>

    1. 차에 대한 세간의 품평이나 값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

    2. 맛본 후 감상은 솔직하게 할 것

    3. 차를 우리는 도구는 간소하게 할 것

    4.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마실 것


    써놓고 보니 오웰이 써놓은 것과는 영 딴판이다. 차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니 요령이라고 알려주는 것도 달라질 수밖에는 없다. 사실 내가 써놓은 요령에는 차의 맛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항목이 일절 없다. 그보다는 차를 대하는 마음이나, 함께하는 사람 같은 간접적으로 차의 맛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에만 집중되어 있다. 어쩌면 그게 내가 생각하는 차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차가 얼마나 훌륭하고 비싸든, 편하고 겸손하게 좋아하는 사람들과 따뜻한 자리를 만드는 것이 차가 맛있어지는 가장 쉬운 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만 지킨다면 하다못해 커다란 머그컵에 티백 하나 퐁당 빠뜨려 마시는 차도 얼마나 근사해지는지, 맛있는 차 한 잔이란 별 거 없단 걸 느끼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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