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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 없는 자 Apr 29. 2022

리니지는 나쁜 게임인가?

리니지의 개발 철학에 대해서

리니지를 증오한다. 비단 필자만의 생각도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리니지를 직접 플레이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리니지를 좋은 게임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어쩌면 플레이하는 본인들조차도). 수백만 원은 우습게 깨지는 대한민국 P2W 게임의 원흉, 양산형 리니지-라이크의 시초, 캐릭터나 직업마저 뽑기로 해결하는 모바일 가챠 게임 BM 모델의 표준 등. 플레이어들이 갖고 있는 리니지에 대한 인식의 현주소다.


하지만 그래서 리니지가 정녕 나쁜 게임인가?라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다. 리니지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와 별개로 리니지를 나쁜 게임으로 볼 수 없는 근거가 넘치기 때문이다. 게임에 대한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그렇다. 게임을 재미를 느끼고자 하는 일종의 놀이나 개발자가 내주는 문제풀이로 보는 사람이라면 다르게 볼 수도 있겠지만, 타인 내지는 AI와 경쟁하여 승패를 가리고자 하는 경기로서 게임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리니지를 나쁘게 볼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현존하는 MMORPG 중에서 손에 꼽힐 만큼 최상위의 경기를 제공하는 이상적인 게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출처는 중년게이머 김실장 유튜브. 리니지의 던전 구조는 방처럼 구성되어 있으며, 방은 일종의 구획이자 영역이 된다.


우선 리니지라는 게임의 레벨 디자인이 그렇다. 리니지의 던전은 각각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이템 파밍을 가능케 하는 몬스터도 좁은 방에서만 주로 나오게 된다. 이미 중년게이머 김실장 유튜브를 비롯하여 리니지의 레벨 디자인 의도를 분석한 글들은 많다. 필자 역시도 두 가지 내러티브에서 레벨 디자인의 의도를 설명한 적이 있었다. 재차 설명해봐야 동어반복에 불과하기에 간략하게나마 설명하자면, 공간을 의도적으로 좁히고 몬스터 리젠을 조절하여 플레이어 간 경쟁을 유도하는 방식이라고 요약할 있겠다. 다만 리니지의 레벨 디자인을 비롯한 게임의 구조가 어떠한 개발 철학을 가지고 만들어졌는지는 지금껏 모르고 있었는데,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리니지를 개발한 NC소프트는 게임을 일종의 경기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공간을 좁히고 플레이어가 얻어낼 수 있는 자원을 한정시켜 플레이어 간 경쟁심을 자극한다. 여기까지는 리니지를 대충이나마 분석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만한 얘기다. 하지만 굳이 왜 플레이어 간 경쟁심을 자극하겠는가? 플레이어들끼리 협력해서 몬스터를 사냥하도록 게임을 디자인하면 안 되는가? 이런 의문을 NC소프트가 가져보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이런 방식으로 게임을 디자인했다는 것은 의도가 명확하다. 플레이어 간 경쟁심을 자극하는 게 게임으로서 더 좋은 물건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니지의 게임은 단순히 

던전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게임 구조 자체가 PVP라는 플레이어 간 경쟁에 맞춰져 있다. 작게는 혈맹원 사이의 경쟁에서부터, 리니지의 꽃이라 불리는 공성전에 이르기까지 플레이어는 게임을 하는 내내 타 플레이어와의 비교와 경쟁에 맞부딪히게 된다.


웹진 닌자크리틱에 따르면, 복싱 경기에서 링의 넓이를 비교적 좁게 제한하는 이유로 선수 간 경쟁을 더 격렬하게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만약 복싱 경기장이 학교 운동장만큼 넓었다면 선수끼리 치열하게 싸우기 어려울 것이다. 한 대 치고 도망가는 식으로 싸우는 게 가장 편하게 이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복싱 경기장이 바뀐다면 선수들은 가까이에서 치고받고 싸울 이유가 사라지게 되고, 발 빠른 아웃복서가 거의 대다수의 경기에서 필승할 것이다. 이 논리는 리니지에게도 거의 정확하게 적용된다. 리니지의 던전이 구획이나 영역으로 나뉘지 않고, 고속도로처럼 하나의 일자형 구조로 바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전처럼 구획이나 영역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니 그만큼 플레이어 간 자리싸움이 벌어질 여지도 줄어들 것이다. 추가로 몬스터들의 리젠율을 폭증시켜 모든 플레이어가 충분히 몬스터를 잡아서 파밍 할 수 있다면 몬스터 사냥을 두고 플레이어끼리 경쟁할 이유는 더욱 없어진다.


즉 리니지는 각 방마다 좁은 방 형식으로 영역을 나누고 몬스터 리젠율을 조절하여 플레이어 간 경쟁을 부추긴다 -> 경쟁에서 패배한 플레이어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 더 강한 혈맹원을 부르든, 현질을 더 해서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든 게임 내에 제공된 여러 수단을 통하여 플레이어의 경쟁력을 높인다 -> 상대 플레이어와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쾌감을 느낀다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야말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상대 플레이어와 몬스터 파밍이라는 대가를 걸고 일종의 경기를 치르는 셈이다. 게임을 하나의 경기로 본다면 결코 리니지를 경시할 수 없는 이유다.


몇 가지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첫째, 게임의 과도한 BM과 P2W이 게임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실상 무소 과금러는 핵 과금러를 이길 수 없는 게임이 아닌가. 둘째, 몬스터를 자동사냥하는 게임을 게임으로 볼 수 있는가. 셋째, 아무리 리니지가 PVP 중심 게임이라 하더라도 별다른 컨트롤 없이 그냥 스펙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게임을 어떻게 인정한단 말인가. 넷째, 그렇다면 본인은 양산형 리니지-라이크를 긍정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이외에도 여럿 있겠다만, 중요하게 다뤄볼 의문점은 이 정도일 것 같다.


우선 첫 번째 의문부터 답해보자. P2W나 BM은 게임 자체의 가치와는 무관하다. 현실의 축구만 보더라도 그렇다. 축구에서도 파리 생제르맹, 맨체스터 시티, 레알 마드리드 같은 팀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서 초엘리트급 선수들을 사 온다. 엘리트 선수와 감독을 사 오고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게임의 P2W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축구도 나쁜 경기인가? 돈으로 선수를 사 오는 시장 내 경제구조와 게임 내부의 퀄리티는 전혀 상관이 없다. BM 구조가 혜자라 P2W이 덜하다고 해서 갓겜이 되는 것은 아니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레스터 시티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한 사례처럼 언더독의 반란이 불가능한 구조가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레스터 시티는 축구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사례일 뿐만 아니라 리니지에서도 유사한 사례로 바츠 해방전쟁이라는 서사가 있다. 언더독의 반란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다.


두 번째로, 몬스터 자동 사냥만으로는 리니지를 게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리니지는 어디까지나 PVP 게임이고 PVE는 PVP를 원활히 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불과하다. 그저 아이템 수집에 불과한 PVE를 자동으로 돌려버리고 PVP에 집중하고자 하는 리니지의 선택일 뿐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 봇의 AI가 형편없다고 해서 리그 오브 레전드가 형편없는 게임이 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 번째로, 컨트롤 요소는 사실상 없어도 전략은 있다. 리니지의 꽃이라 불리는 공성전은 실제로 수백 명의 혈맹원들이 뒤섞이는 다대다 대전으로, 단순 스펙뿐만 아니라 진형이나 전략의 요소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당연히 리니지-라이크를 긍정하지 않는다. 다만 리니지-라이크가 현재 한국 모바일/온라인 게임들의 표준이자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 잡은 만큼, 그 형식의 원형이 된 게임인 리니지만큼은 어느 정도 공로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수의 플레이어가 갖고 있는 인식과 다르게, NC소프트는 좋은 RPG가 무엇인지, 나아가 좋은 게임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회사고 철저하게 게임으로 구현할 줄도 안다. 리니지가 로그라이크 게임인 넷핵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고, 지금은 우주 먹튀로 유명하지만 과거 울티마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리처드 개리엇을 비롯하여 폴아웃의 팀 케인, 마이트 앤 매직, 킹스 바운티의 존 반 캐니햄과 같은 거장들을 영입한 전력이 있으며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을 플레이해본 김택진 대표가 NC소프트의 전 직원에게 스위치를 선물해줬다는 일화도 있다. 이 개발사는 좋은 게임을 볼 줄도, 만들 줄도 아는 저력이 있는 회사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게임을 돈 벌기 위한 수단으로써 지나치게 악용한다는 점이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경기로서 게임을 해석하는 사람이라면 리니지는 필히 플레이하고 연구해야 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정말 이상적인 게임일지도 모른다. 다만 필자는 게임으로서 리니지가 갖는 가치는 인정할 수 있을지언정 좋아할 수는 없다. 한국 게임판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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