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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 없는 자 Apr 14. 2022

게임에서 캐릭터의 외모가 그리도 중요할까

플레이어는 게임에 몰두하고 게임을 지속해서 플레이하기 위해서, 게임의 장비가 제공하는 미학적인, 정서적인, 일시적인 가치를 기꺼이 포기한다. 우리는 이것을 무관함의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체스 게임 플레이어는 꼭대기 위에 정사각형 모양의 리놀륨 조각으로 장식된 병이나, 상감 세공을 한 대리석 위에 금으로 만들어진 조각상, 혹은 특별히 배열된 정방형 중정으로 된 색색의 판성 위에 유니폼을 입고 서있는 사람의 조각을 가지고 체스 게임을 하더라도, 플레이어는 '똑같은' 포지션으로 게임을 시작하고 전략적인 공격과 방어를 한다. 다시 말해, 플레이어는 게임 말의 생김새와 관계 없이 똑같은 재미를 만끽한다.


                                                                                                 어빙 고프먼 - 무관함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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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게임계의 캐릭터들이 화두다. 뭐만 하면 게임 캐릭터에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가 묻었다든지, 페미니즘 때문에 캐릭터가 못 생겨졌다든지 하는 식이다. 그러한 주장들이 PC와 페미니즘을 이론적/개념적으로 얼마나 오용하고 있는지, 논리적으로 허술한 측면이 있는지 등은 차치하자(사실 진지하게 써보려다가 글이 너무 길어져서 포기했다. 돈 받고 쓰는 것도 아니고...). 따져보자면 할 수 있겠지만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지금 필자가 쓰고자 하는 주제는 다른 내용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위에 인용한 무관함의 법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제법 많을 것이다. RPG나 어드벤처 게임만 봐도

캐릭터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기 때문이다. 캐릭터 하나 미형으로 잘 만들면 캐릭터 하나를 뽑는답시고 수십~수백만원의 돈을 지르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특히 원신이나 페이트/그랜드 오더같은 모바일 캐릭터 가챠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 사람들에게 게임 말(캐릭터)의 생김새와 게임의 재미가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파이널 판타지 10의 유우나(좌)와 발더스 게이트 2의 이모엔(우)


그럼에도 필자는 무관함의 법칙을 지지한다. 과거의 위대한 게임들은 캐릭터의 외모나 성격 따위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의 동시대에 발매되어 당대 RPG계를 양분했던(원리주의 RPG 플레이어들이라면 증오해 마지 않는 게임들이겠지만)파이널 판타지 10과 발더스 게이트 2의 히로인을 비교해보자. 십중팔구 발더스 게이트 2의 이모엔보다 파이널 판타지 10 유우나의 외모를 비교 우위로 두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동/서양 미의 기준이 다르다는 식으로 본다면 반대의 입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서양 커뮤니티에서도 이모엔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플레이어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발더스 게이트 2는 나름의 입지를 공고히 다졌고,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가 나오기 전까지는 서양 RPG의 왕으로 취급받았다.

 

캐릭터의 외모가 갖는 중요도는 생각보다 부수적인 수준에 그친다. 10년 전 플레이어들이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에 열광했던 이유는 끝없이 펼쳐진 광대한 월드 속에서의 압도적인 놀이의 자유와 상호작용이었지, 탈모어의 하이엘프가 이뻐서가 결코 아니었다. 굳이 울티마나 위저드리 시절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다. 인피니티 엔진의 게임들이나 클래식 폴아웃, 모로윈드 정도만이라도 경험해본 필자와 동년배의 플레이어라면 그 시절 캐릭터들이 캐릭터의 외모를 앞세워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때도 다양한 설정과 개성을 갖춘 캐릭터들은 많았고 플레이어들은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캐릭터의 외모나 성격 따위가 어떻든 간에 게임 자체가 훌륭했기에 성공했던 것이다.


적어도 필자는 20년 전 바이오웨어의 게임에서 나온 여성 캐릭터들과 올해 발매된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의 에일로이 사이의 외모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이모엔이나 비코니아가 2022년에 나왔다면 PC때문에 캐릭터들이 못 생겨졌다면서 똑같이 욕을 먹었을 것이다. 다만 그 시절에는 그저 '양키 센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면, 지금은 PC나 페미니즘이라는 그럴싸한 핑계가 생겼을 뿐이다. 따라서 필자는 캐릭터의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 플레이어들을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도 않는다. 게임 캐릭터는 그저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한 도구이자 기호에 지나지 않기에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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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1) 게임에서 '캐릭터 자체'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캐릭터란 플레이어의 분신이고, 캐릭터를 조종함으로써 게임은 보다 더 다양한 규칙을 활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더욱 훌륭한 플레이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액션 게임에서 캐릭터를 위/아래/좌/우로 조종할 수 있음으로써 위치선정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며, 게임이 가지고 있는 레벨 디자인과 더불어 게임 플레이의 깊이를 더해주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즉, 게임 캐릭터는 게임 기저에 존재하는 규칙/레벨 디자인과 연계되어 게임 플레이를 심화시켜주는 역할로 '한정한다면' 충분히 필요한 요소라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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