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와 스트리머 간 권력관계에 대해서
코로나 확진자가 되어 집에서 자가격리를 하고 있다. 덕분에(?) 기대작이었던 엘든 링을 마음껏 하고 있다. 라단을 잡고 로데일에 진입했으니 중반부를 조금 넘긴 것 같다. 게임을 하면서 커뮤니티를 보고 있는데, 생각해볼 만한 논란이 있어서 글을 써본다. 게임의 난이도 논란이다.
여전히 적지 않은 수의 플레이어가 엘든 링을 어렵고 마니악한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18일 만에 글로벌 판매량 1200만 장을 달성한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한국에서 '국민 게임'이라고 불리는 스타크래프트의 판매량이 1100만 장이다. 그것도 발매된 지 무려 17년이 지난 2015년에서야 간신히 달성했다). 대중적으로 매우 성공한 게임이고 판매량은 전혀 마니악하지 않지만 상당수의 인식은 여전히 그렇다. 어렵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우선 게임이 불친절하다. 그 흔한 퀘스트 저널도 없고, 마커도 없다. 그나마 알려주는 건 어느 방향으로 가라고 인지해주는 축복의 인도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처음에 그대로 따라가면 트리 가드와 멀기트에게 뚝배기 깨진다. NPC의 위치조차 1.0.3 패치 이후에나 간신히 업데이트로 추가해줬을 뿐이다. 자신이 퀘스트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8~90년대의 고전 CRPG에서나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형식이다. 직접 메모장에 저널을 작성해가면서 플레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아니면 그냥 공략을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프롬식 퀘스트 디자인의 의도는 명확하다. 플레이어 스스로의 모험을 중시하는 게임 디자인이다. 비록 사소하게 놓치는 부분이 있어도 플레이어가 직접 플레이하는 과정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스스로 정보를 찾고, 저널을 작성하며 엔딩 장소로 향하는 과정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끌어 나가는 게임.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에 집중한 게임이다. 따라서 이 게임은 그 어떤 프롬소프트웨어의 게임보다도 전통적인 RPG에 가깝다. 액션 요소가 강하다 해서 RPG 스러운 모습이 약하다고 볼 수도 없다. 게임은 내러티브의 뼈대와 난관을 준비하고, 어떤 식으로 게임을 진행해 나갈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자율에 맡기는 식이다. 야생의 숨결이나 이머시브 심 게임처럼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사물을 상호작용하여 문제를 창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디자인은 아니지만, 적어도 플레이어가 주체가 되어 내러티브를 이끌어 나간다는 점에서 이전에 소개했던 워렌 스펙터의 철학과도 상당 부분 부합하는 게임이다.
하지만 이러한 디자인은 신규 플레이어에게 일정한 수준 이상의 진입장벽을 세울 수밖에 없다. 플레이어가 스스로 생각하며 난관을 극복하고 게임을 진행하라는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게임 내에서 직접 알려주는 건 하나도 없고 모든 자료가 파편적으로만 주어진다. 그만큼 플레이어는 어떻게 난관을 극복하고 게임을 진행해야 할지 더 많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A부터 Z까지 해야 할 일을 전부 다 알려주는 AAA 게임의 디자인에 길들여진 플레이어라면 어렵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상한 기미를 느낀다. 이 게임의 난이도가 실제보다 과하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글이나 댓글들을 읽다 보면 비선형적 월드 디자인으로 인해 난이도 조절이 가능하여 초보자 입문이 쉬워졌다는 말이 많음에도 여전히 초고난도 게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을 게임 제대로 해보지도 않은 '겜알못'으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지만, 오늘 필자는 그러한 엘리트주의적 시각을 접고 냉정하게 원인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번 분석은 간단하지만, 비단 엘든 링뿐만 아니라 난이도를 과대평가받고 있는 상당수의 게임에 적용될만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게임 난이도 과대평가의 시발점이 인터넷 방송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방송에는 권력관계가 작동한다. 시청자와 스트리머 사이에서다. 시청자는 스트리머의 콘텐츠를 보고 싶어 하고 스트리머는 시청자가 원하는 콘텐츠를 제공한다. 다만 여기서 시청자는 갑이다. 스트리머가 받는 자본은 시청자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권력관계를 자명하게 드러내는 순간이 바로 시청자가 '미션'을 걸 때다. 시청자는 자기가 원하는 콘텐츠를 보고 싶고 스트리머가 그러한 콘텐츠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미션을 건다. 엘든 링을 사례로 들면 초반에 만나는 트리 가드, 멀기트 보스전에서 보스 사냥 미션을 거는 경우가 많다. 미션이 걸리면 스트리머는 '절대' 이 미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보스 하나를 잡으면 못해도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의 돈이 한 번에 들어오는 데 어떻게 순순히 물러설 수 있겠나. 다른 데 가서 파밍을 할 수도, 스펙을 올릴 수도, 다른 방법을 고안해볼 수도 없다. 미션을 건 시청자들이 원하는 건 지금 당장 이 보스를 사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레벨에 기본 장비만 들고 말이다. 여기서 죽음의 보스 트라이가 시작된다. 트리 가드 219트, 멀기트 332트. 맥없이 죽어나가는 스트리머의 방송을 보며 시청자의 뇌리에는 엘든 링의 인상이 강렬하게 자리 잡는다. '역시 프롬 소프트웨어의 핵불닭맛 난이도'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스트리머가 죽는 모습을 짤방으로 만들며 인터넷의 수많은 커뮤니티에 해당 영상을 유포한다.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영상을 보며 선입견이 생긴다. '와 역시 프롬 게임은 엄청 어려워.', '역시 소울류 게임은 하는 사람만 하는 마니악한 게임이라니까' 등 이런 식이다. 이러한 인식들은 커뮤니티에서 엘든 링에 대한 파편적인 영상, 자료들과 함께 섞이면서 엘든 링은 초고난도 게임이라는 밈(Meme)이 만들어진다. 심지어 직접 플레이해보지도 않았음에도 초장에 겁부터 덜컥 먹고 해당 게임에 대한 무언의 공포감 같은 게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프롬 게임은 어렵고 마니악하다는 시류에 편승하고자 하는 유튜버들의 리뷰까지 첨가하면 금상첨화다. 이 과정은 마치 일부 황색 언론이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발생한 사건의 맥락을 무시하고 부분만 떼내어 과다하게 취재하고 보도하여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사례와 매우 유사하다. 그렇게 게임의 난이도는 실제 게임이 가지고 있는 난이도보다 훨씬 과대평가된다. 엘든 링은 초고난도 게임이라는 '탈진실'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정말 엘든 링이 그토록 어려운 게임이었다면 출시된 지 3주도 되지 않아서 1200만 장을 팔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게임은 명백히 대중적인 게임이고, 플레이어가 조금만 유연하게 게임을 진행한다면 얼마든지 게임의 난이도를 낮출 수 있다. 나중 가면 보스 전보다 오히려 필드 전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지금 로데일 지하 하수도를 돌고 있는 필자가 그렇다). 사람들이 엘든 링의 난이도가 너무나 어렵다는 세간의 인식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턱대고 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단히 어려운 게임도 아니다. 특히 ARPG 팬들이라면 한 번쯤은 충분히 플레이할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므로, 겁먹지 말고 플레이해봤으면 한다.
ps. 엔딩을 보고 나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