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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적인튀김요리 Jun 28. 2022

가해자가 빌린 피해자의 노잣돈

마흔한 번째 책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


<깔끔하게 꽂는 책꽂이>는 초등학생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작품을 선생님의 관점에서 읽고 소개합니다. 주변에 책이 재미없다는 이유로, 지루하다는 이유로 혹은 길거나 어렵다는 이유로 멀리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책을 권하고 함께 이야기하고 공감하며 천천히 그리고 끝까지 읽어보세요. 그러면 아이들은 분명, 그다음의 책을 스스로 찾아 나설 겁니다.



학폭 미투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문제가 되고 있는 지금, 선생님으로서 본질적으로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오래 전의 학교폭력이 해소되지 못하고 이토록 긴 시간,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괴롭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말이죠. 결국, '진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피해자는 진심이 담긴 사과를 받지 못했고, 가해자는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하지 않았죠. 학폭위를 한 번 열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서면 사과 처분이 떨어졌죠. 이제야 돌이켜, 문득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당시 서면 사과를 받았던 그 아이는, 처분에 맞게 사과 편지를 쓴 그 아이를 진심으로 용서했을까라고 말입니다.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는 학교폭력의 가해자, 동우가 주인공입니다. 가해자가 주인공인 경우는 동화에서 흔하지 않은 경우죠. 동우는 갑자기 일어난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 저승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동우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저승사자가 다른 사람과 이름을 착각한 탓이죠. 어쨌든 죽지는 않으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이승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이승행 버스를 탈 교통비, 노자가 필요한데 동우의 저승 곳간은 텅텅 비어있었죠. 동우는 하는 수 없이 다른 이의 노자를 빌려 이승으로 갑니다. 그리고 빌린 노자의 주인은 동우가 늘 괴롭히고 있는 준희였죠. 아직 책의 초반이지만, 이후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합니다. 빌린 노자는 갚아야 할 테고 노자의 주인은 학교폭력의 피해자인 준희입니다.


이승으로 돌아온 동우의 노자 장부에는 正자 오십 개가 그려져 있습니다. 동우는 일단 이승의 돈으로 준희에게 갚아 보려고 합니다. 태호네에서 훔친 돈으로 준희에게 선심 쓰듯 10만원을 쥐어주죠. 하지만 노자 장부의 正은 단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돈이 모자랐던 걸까요? 노자를 모두 갚아야 하는 시간은 고작 49일. 그 안에 노자를 다 갚지 못하면 동우는 다시 저승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돈으로 갚는 것 이외에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동우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노자 장부의 正자 하나가 사라집니다. 10만원을 줬을 당시엔 꿈쩍도 없던 게 갑자기 줄어들었습니다. 대체 노자는 어떻게 줄어드는 걸까요?


좀 전에 준희를 도와준 것 때문이 분명했다. '혹시 지난번에 사라진 正자는 준희가 지각하지 않게 도와준 것 때문인가? 그렇다면 준희를 더 열심히 관찰하고 '노자 갚기 프로젝트'를 실행시키면 正자가 마구 사라지겠지?'


동우가 깨달은 노자를 갚는 '진짜' 방법은 준희를 돕는 것입니다. 억지로 돈을 주는 건 진심이 담기지도 반성이 담기지도 않았겠지만, 준희를 돕는 일에는 진심과 반성이 필요하니까요. 결국 노자를 갚기 위한 방법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자신의 행동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동우는 준희를 관심 있게 관찰하면서 준희를 돕기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동안 준희에게 혹은 다른 친구들에게 했던 행동을 돌아보고 진심으로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사과를 준희에게 건네죠. 그 사과는 '서면 사과'처럼 장황하거나 거창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 말에는 진심이 있었습니다.


"그랬구나." 동우는 그 말만 하고 한참을 가만히 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응." 준희는 무덤덤하게 대답했고 조금 뒤 쌕쌕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이 들었다.



동우의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하다. "나 돌아왔어!"라는 대답은 동우가 있어야 할 곳을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뜻한다. 삶은 '프로젝트' 따위가 아니며 장부로 계산을 종료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긴 여정임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지금 이 순간도 돈의 위력을 믿고 파괴의 길로 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우리는 그들에게 거듭 절명한다. 그러나 절망의 말을 되풀이하는 동안 구출되지 못한 양심은 죽어 가고 아무 곳으로나 끌려가 버린다. '무엇이 잘못이었지?'를 되묻고 하나하나 바로잡으려는 처절한 노력만이 우리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심사평 중에서)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동우는 준희와 함께 기른 '힘찬이'를 구하려다 차에 치일 뻔합니다. 그렇게 다시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동우는 다시 저승사자를 만나게 되죠. 그리고 저승사자는 남은 노자 빚이 다 사라졌다며, 아주 나중에 만나자는 말로 동우를 이승으로 기쁘게 보내줍니다. 다시 눈을 뜬 동우는 큰 소리로 웃으며 "나 돌아왔어"라고 외치죠. 첫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을 때, 동우는 살아있음에 기뻐하고 안도했지만 이번엔 이유가 달랐습니다. '진짜' 전동우로 돌아온 것이니까요.


다시 학교의 이야기로 돌아가, 서면 사과를 받았던 그 아이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반강제로 서면 사과를 썼던 아이를 떠올립니다. 아직도 둘 사이에는 갚지 못하고 돌려 받지 못한 노자가 남아있겠다 싶습니다. 그 상황을 돌려놓기엔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지만, 학폭위에서 내려질 처분 이외에 제가 해야 할 일을 동우를 만난 저승사자를 통해, 동우를 괴롭힌 노자 장부를 통해 이제라도 무겁게 깨닫습니다. 아이들과 읽으며, 진심이 담긴 사과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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