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 미련이 걷히는 봄이 오길.
"심리적 빈곤은 이성적으로는 자신은 충분히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존재가 될 만큼 '소유'하지 못했음을 인식할 때 생성되는 감정이다."
- Thomas Leoncini, 『액체 세대의 삶』
예전에 한 인턴 면접을 보는데 롤모델을 물어보더라. 빈출 문항이고 워낙에 클래식이라 질문의 의도는 잘 알고 있었지만 미처 준비하진 못했다. 바로 떠오르는 사람은 있었는데, 이미 나만의 작은 북극성이 아닌지라 너무 뻔하고. 그렇다고 좀 참신한 인물을 즉석에서 생각해내자니 진심으로 롤모델 삼고 싶을 정도의 인물은 딱히 없었다. 그래도 면접에선 뭐라도 말해야지 어쩌구... 쉿. 내가 면접에서 젬병이란 사실은 내가 더 잘 안다.
내가 정작으로 닮고 싶은 인물들은 지금 당장 내 옆에 있는,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내 앞에 두고 따라 걷고 싶은 사람이 지나치게 많아서 롤모델을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굳이 세상이 다 알고, 동시에 아무도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롤모델 삼을 필요가 있나. 주위를 보면 다 나보다 나은데.
나는 대체로 남에게 관대하고 자애롭다. 내게 애정이 많아서가 아니라 내가 가지지 못한 걸 적어도 하나씩은 가진 그들이 진심으로 부럽기 때문이다. 남 앞에 서면 내가 가진 것들이 유난히 작아보인다. 그래서 더 커보이려고 애쓴다. 내가 잘 모르는 주제로 이야기할 때 괜히 아는 척 앉아 있는다거나, 내게는 없는 그들의 장점을 잘 포착하고 칭찬하면서 '여유로운 조력자'를 자처한다거나.
저번에 동아리 회식하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리더라고 해도, 남들한테 그렇게까지 애쓸 수 있는 이유가 뭐냐?" (뉘앙스만 살림... 술이 쫌 들어간 뒤라서.) 이제 제대로 알겠는데, 그게 남한테 애쓴 게 아니라 나를 위해 노력한 거였다. 나에게 없는 장점을 지닌 사람들한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면 내 심리적 빈곤이 잠시나마 해소되니까. 가난한 마음을 달래려 내게 없는 걸 소유한 이들과 동행하는 데에만 집중했고—늘 어딘가에 속하기 위해 애썼고—그럴수록 내가 가진 고유한 것들을 들여다 봐주지 못했다.
분명히 나도 꽤 괜찮은, 고유한 장점이 있는 사람일 텐데. 그런 믿음은 있는데 증명이 어렵다. 결국 내가 겪는 가난한 마음의 문제는 이상이 너무 높아서 달성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니라, 이상이 너무 많아서 '전부' 달성하지 못한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닮고 싶은 사람이 주변에 많은 건 좋지만 이젠 눈을 밖으로 그만 돌리고 나를 살필 시간이다.
이 시간을 내기 위해 이번에도 나는 많은 걸 미뤘지만, 전과는 달리 이젠 닮고 싶은 사람들과 떨어지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어딘가에 속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요즘은 오디세이를 포함해서 함께 발맞춰 걷고 싶은 친구들을 찾아 서로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고 있다. 올해 2월 29일에, 그저 동아리에 남기 위해 다른 것들을 미루면서 했던 말을 다시 그대로, 그러나 다른 마음으로 가져오며 이 글을 마친다.
"요즘 나의 하루하루가 다 윤일 같다. 매번 조금씩 남은 미련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기어이 낸 시간이니. 그러니 어떤 의미를 만들고야 말겠다. 왜 모두가 3월일 때에도 2월 29일이어야 했는지, 그걸 부끄럽지 않게 설명할 수 있을 때 나는 봄으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가는 길에 낙엽이 지고 눈이 덮였다 이 모든 미련을 봄이 도로 거둘 때까지, 부디 우리의 걸음을 응원해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