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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u May 20. 2020

(4) 예의가 삐뚜루

직장인 늦깎이 유학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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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의가 삐뚜루


한국에 방문하는 동안 조승연 작가가 쓴 "플루언트 영어 유창성의 비밀"이라는 책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서점 세 군데 정도를 뒤져 겨우 찾을 수 있었는데 당연히 이 책의 부제인 "영어 유창성의 비밀"을 너무 알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서 영어가 조금이라도 더 유창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언어학적으로 영어가 얼마나 우리의 언어와 다른지 이해할 수 있었고 심지어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사고의 방향과 구조 자체가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내가 영어를 못하는 가장 본질적인 핑곗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아래 내용은 플루언트에서 영어와 한국어의 다름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을 발췌 인용한 것이다.



미국의 외교관 양성 기관인 FSI(Foreign Services Institute)는 미국인에게 맞는 외국어 교육에 통달한 곳이다. 미국은 시계 모든 나라와 긴밀한 경제 정치 군사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외국어를 원어민 못지않게 잘하는 능력이 매우 긴요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이 기관에서는 학습 난이도에 따라 모든 외국어를 5개 레벨로 나누었다. 


가장 배우기 쉬운 1 레벨 언어는 미국인이 약 6개월에 거쳐 600 시간의 수업을 들으면 마스터할 수 있는 언어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이 해당된다. 

2 레벨 언어는 750 시간이 필요한 독일어이고, 

3 레벨 언어는 900시간이 필요한 인도네시아어, 말레이시아어, 스와힐리어이다. 

4 레벨 언어는 1100시간의 강의를 들어야 마스터할 수 있다. 라오스, 태국, 우즈베크스탄, 아프리카의 줄루족 언어같이 우리에게는 생소한 언어가 이에 해당된다. 

가장 어려운 5 레벨 언어는 4 레벨 언어보다 약 두 배나 어렵다. 즉 무려 2200 시간의 수업이 필요하다. 


대학 학기에 비유해 보자. 교양과목이라고 치고 한 학기에 2시간씩 20강으로 산정하면 무려 55학기를 들어야 하는 분량이다. 하루 2시간씩 주말 없이 매일 공부한다고 쳐도 3년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도 이미 미국 외교관 시험에 붙을 정도의 어학 능력이 있는 사람이 기준이다. 5 레벨에 해당하는 5개 언어 중 4개가 동아시아 언어로, 광둥어,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다 (나머지 하나는 아랍어).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한국어 사용자에게 5 레벨 언어는 바로 영어가 된다.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이 영어를 어렵게 느끼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여러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을 정말 흔하게 만날 수 있다. 독일 사람들도 전반적으로 영어 실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독일과 같은 제2 외국어 권에 살다 보면 영어로 말해줄 수 있냐고 부탁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이럴 때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약 1초간 흠칫 당황하며 곧바로 영어로 설명을 해 준다. 머뭇거릴 필요도 없는 유창한 실력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공부를 했길래 영어를 잘하냐고 물어보면 겸손하게 내 영어는 School Language 수준이라고 말한다. 학교에서 배운 영어 정도를 구사한다는 뜻인데 독일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영어 교육이 실용적일 것이라고 짐작은 해 보지만 내 자격지심은 이를 곧이 받아들이지 못하곤 했다. 도대체 어떤 학교를 다녔길래 School Language가 저 정도냔 말이다. 과연 좋은 학교 영어 교육만이 독일인의 영어 실력을 높였을까?


독일 초기 정착 때 도움을 많이 주었던 한 독일인 친구는 영어가 독일인 평균 이상으로 유창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영어에 관심이 많았고 영어책을 많이 읽었다고 했다. 영어로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하는 독일인 친구도 비슷하게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좋아했고 계속 영어 콘텐츠를 접했다고 했다. 두 친구는 비슷한 방식의 영어 학습을 자발적으로 하였고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영어에 관심을 갖고 자주 접하는 것 이상으로 언어의 유사성이 이 친구들이 영어를 쉽게 배우는데 큰 역할을 한다고 추측한다.


언어의 유사성

독일어와 영어는 문법적으로 매우 유사한 언어이고 비슷한 단어, 비슷한 어원을 가진 단어도 많다. 그래서 독일인이 그들의 모국어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 유사 단어와 문장을 캐치해 내고 빠르게 정보처리를 하며 영어 콘텐츠를 비교적 쉽게 이해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나와 완전히 똑같은 수준의 영어 실력을 가진 독일인이 있다고 가정을 하고 나와 그 독일인에게 우리의 실력보다 난이도 있는 생소한 영어 지문을 들려준다고 상상해보자. 이것은 사고 실험일 뿐이지만 나는 독일인이 영어와 유사한 모국어 백그라운드를 가짐으로써 그 지문을 나보다 더 잘 이해할 것이라고 실험의 결과를 예상한다. FSI가 정한 레벨 2의 언어와 레벨 5 언어는 영어 습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갖는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영어 학습에서 불리함을 갖는다는 정도를 아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는데 꽤 큰 도움이 된다.


우리는 과연 School Language 수준이라며 학교에서 배운 영어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될까? 불행하게도 영어의 다름과 어려움을 넘어서기에는 과거 한국의 영어 교육은 너무 구식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좋아졌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옛날 영어 교육하면 떠오르는 일본식 영어 문법 교육은 문제가 많았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면 이 옛날의 영어 교육 방식이 고스란히 나온다.


배우 권태원 님이 영어 선생님 역할을 아주 맛깔나게 소화하였는데 선생님은 영어 수업에서 한문과 영어를 칠판에 병기하며 문법을 설명한다. "be to"용법은 "예의가 삐뚜루” 로 암기하라며 학생들에게 복창시킨다. "be to"는 예정, 의무, 가능의 상황에 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의/가/삐뚜(be to)루"가 되는 것이다. "be to” 가 예정, 의무, 가능과 어떻게 연관이 되던 것인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런 상황에 쓰고 있는 것 같긴 하다. 명사의 종류는 "고유, 추상, 보통, 집합, 물질"로 구분하여 이 종류를 머릿 글자로 축약 암기를 시킨다. 모든 언어에 있는 명사는 영어만 왜 그리 복잡하게 나누는지 아직 잘 모르겠고, 다만 남고 학생들에게 선정적인 단어를 주입하여 암기를 빨리 시키겠다는 목적은 확실히 알겠다.


예의가삐뚜루

이 교육 장면을 떠올려보면 선생님이 가르쳐 준 암기 방법이 영어를 실생활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이 교육은 시험에서 아닌 것 혹은 맞는 것 골라내기를 할 때 매우 효과적으로 답안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암기법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지식을 요구하는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한들 영어를 잘 구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공연히 이상한 기준으로 줄만 섰을 뿐이고 성적이 나쁜 학생들에게 불필요한 열등감만 심어줬을 뿐이다.


불필요한 열등감

영화의 배경이 1978년이니 나와는 25년 정도 차이가 난다. 하지만 나 또한 실제로 이런 영어 교육 방식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내가 어렸을 때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속의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 같은 영어를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달해 주던 선생님들도 상당히 많았다. 영어를 소통하기 위한 언어로 인식하기도 전에 be 동사의 종류와 변화를 배우고 부정사가 무슨 뜻을 말하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to 부정사를 배웠다. 지금 나보다 스무 살이 더 어린 학생들이 중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데 만약 아직도 영어 교육이 삐뚜루 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난 정말이지 슬퍼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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