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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u May 20. 2020

(3) 바보 인증

직장인 늦깎이 유학 수기

직장인 늦깎이 유학 수기


(3) 바보 인증


내가 들었던 석사 과정은 영어로 진행되었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병행되는 수업이었다. 약 10명 남짓의 학생들은 세계 이곳저곳에서 온라인으로 그리고 또 10명 정도의 학생들은 오프라인으로 강의실에서 그러나 모두는 중앙 유럽 표준 시간대에 머물러 있었다. 수업은 계속해서 비디오로 촬영되어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녹화되고 있기 때문에 이 비디오 파일은 수업이 끝난 후 제공되기도 했다.


그런데 난 이 비디오 파일을 다시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곳엔 나를 유독 불편하게 만드는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 그것은 나다. 교수가 질문을 할 때마다 당황하며 못 들었다고 되묻는 인물. 심지어 교수가 도와주겠으니 천천히 말하라고 하는데 됐다고 거절까지 한다. 세상에 이럴 수가. 정중하지 않게 거절당한 교수는 그 이후로 나에게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랜 경력을 가진 엔지니어들과 변호사로 구성된 학생들 가운데서 나는 군계일학의 반대 의미로 심하게 눈에 띄었다.   


하루는 너무 답답해서 수업 도중에 노트북에 깔린 카카오톡으로 조심스럽게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최근에 미국에서 로스쿨을 졸업한 친구였다. 나도 법 비스무리 하던 것을 전공하고 있던 중이어서 이 친구가 가장 적절한 해답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질문은 다음 세 가지였다.


"넌 어떻게 이걸 한 거야? 이런 상태로 얼마나 버텨야 해? 이 상황이 개선이 될까?"


눈앞이 막막하여 이 상황이 개선될 여지는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면 버티기에 들어가기 위한 심리적 준비 태세는 어떻게 갖추어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또한 나보다 친구가 훨씬 똑똑한 건 알고 있었으나 그렇게나 똑똑한 사람이었는지도 확인을 하고 싶었다. 나의 부족함은 세 트럭에 담아도 모자라 보일 지경이었는데 희한하게도 질문은 세 가지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때 친구가 해 준 말은 이상하리만큼 큰 위로가 되었다.


“최소한 1년은 바보 인증해야 돼.”


사실 친구와 내가 썼던 단어는 바보 인증이 아니라 ㅂㅅ 인증이었다. ㅂㅅ인증이라는 비속어를 그대로 옮기는 것에 대하여 독자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갖는다. 그러나 영어실력 부족으로 인해 모국어가 따스히 보호해 주는 곳에서보다 훨씬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고 수업 도중의 토론이나 일반 대화의 참여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순화된 표현일 수 있다. 실제로 나는 1년이 더 걸리는 시간 동안 바보 인증을 하긴 하였으나 친구의 경험에서 우러난 위로 덕분에 1년 정도는 여유를 가지고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었다.


최소 1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할 것이다. 10년 넘게 공부해 온 영어가 입 밖으로 구사되도록 만드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나는 언어가 준비되지 않는 한 1년짜리 석사 과정을 지원하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 편이다. 1년은 정착만 하기에도 넉넉하지 않은 시간인데 특히 나와 같은 늦깎이 유학생들은 대부분 가족들과 함께 이주를 고려하기 때문에 공부 외에 엄청난 시간을 정착에 쏟아야 한다. 그래서 언어와 학업을 모두 손에 쥐기가 물리적으로 부족할 수 있다. 유학 후 외국에 거주할 생각이라면 언어와 학업에 더해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1년 안에 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바보 인증

유학 초반에 맞닥뜨린 언어 장벽에 너무 좌절해서는 안된다. 자책할 필요도 없다. 한국에서 아무리 영어 공인 시험 성적으로 영어 실력을 입증했어도 내가 겪은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생길 수 있다. 자존심 상하고 답답한 1년의 시간이지만 단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사는 것 만이 나를 점진적으로 바보 상태에서 구출해 줄 수 있다.


얼마 전 회사 선배가 나와 비슷한 전공을 하러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개강을 하고 며칠이 지나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ㅈㅇ야 너는 이걸 어떻게 한 거야?”        


난 어떻게 위로를 전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Operahuset Oslo / Os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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