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엄마랑 동갑이에요

세대를 넘어 통하는 것들

by 캔디작가


출근 2주차.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슬랙 채널도 다 파악했고, 노션 정리법도 익혔고, 사람들 이름도 외웠다. 근데 아직 어색한 게 하나 있다.


점심시간.


"과장님, 점심 뭐 드실래요?"


한소희 씨가 물었다. 그 '저희 엄마랑 동갑이에요'의 소희 씨. 첫날 이후로 소희 씨가 나한테 말 걸 때마다 살짝 긴장된다. 또 무슨 폭탄 발언을 할지 몰라서.


"음, 아무거나 괜찮아요."


"저희 오늘 마라탕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마라탕. 시우가 좋아하는 거. 나도 먹어본 적 있다. 근데 회사 사람들이랑 먹으면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다.


"그래요, 같이 가요."




마라탕 집은 회사에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재료를 직접 골라서 담는 방식이다. 소희 씨가 앞장서서 이것저것 집어 넣었다. 청경채, 팽이버섯, 어묵, 분모자...


"과장님, 분모자 좋아하세요?"


"뭐요?"


"분모자요. 이거요. 당면 같은 건데 동그란 거."


아, 이거. 먹어본 적 있는데 이름을 몰랐다.


"아, 그게 분모자구나. 처음 알았어요."


"맛있어요. 꼭 넣으세요."


분모자를 집어 넣었다. 소희 씨가 옆에서 도와준다. 처음 왔을 때 시우가 이렇게 가르쳐줬던 것 같은데. 입장이 바뀌었네.





자리에 앉아서 마라탕을 기다렸다.


소희 씨가 핸드폰을 보다가 갑자기 물었다.


"과장님, 혹시 인스타 하세요?"


인스타. 인스타그램. 계정은 있다. 근데 마지막으로 올린 게 3년 전인가? 고양이 카페 갔을 때 사진.


"하긴 하는데... 거의 안 봐요."


"팔로우해도 돼요?"


"어?"


왜 나를 팔로우하려고 하지? 올린 것도 없는데.


"저 새로 들어오신 분들이랑 다 친추해요. 회사 사람들이랑 소통하려고요."


소통. 인스타로 소통. 코러스미디어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거기서는 회사 사람들 SNS는 절대 안 하는 게 국룰이었다. 괜히 팔로우했다가 뒷담화 스토리 올리는 거 보면 골치 아프니까.


"그래요, 해도 돼요. 근데 진짜 올린 거 없어서 재미없을 거예요."


"괜찮아요. 저도 일상만 올려요."


소희 씨가 핸드폰으로 내 계정을 찾더니 팔로우 버튼을 눌렀다.


"과장님, 프사 고양이예요?"


"네, 예전에 고양이 카페 갔을 때 찍은 거예요."


"귀여워요. 고양이 좋아하세요?"


"네, 좋아해요. 키우고 싶은데 애들이 알러지가 있어서 못 키워요."


"아, 저희 집도요! 저도 고양이 키우고 싶은데 엄마가 알러지 있어서 안 된대요."


또 엄마 얘기다. 근데 이번에는 덜 찔렸다. 그냥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마라탕이 나왔다.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소희 씨가 영상 편집 공부 중이라고 했다.


"저 아직 프리미어밖에 못 해요. 에펙은 기초만 배웠고."


"에펙이 처음엔 어렵죠. 저도 처음에 헤맸어요."


"과장님은 언제부터 에펙 쓰셨어요?"


언제부터더라. 기억을 더듬었다.


"2005년인가? 그때 에펙 6.5였는데."


"6.5요? 저 그때 초등학생이었는데..."


...또 비수가 꽂혔다.


"아, 죄송해요. 제가 자꾸 나이 얘기를..."


소희 씨가 당황했다. 표정이 미안해 보인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실이니까요."


"그게 아니라... 저 진짜 악의 없이 말한 건데, 자꾸 생각 없이 말해서..."


"알아요. 소희 씨가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닌 거."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소희 씨가 마라탕을 휘젓다가 말했다.


"저... 사실 과장님 오셔서 좋아요."


"네?"


"저 입사하고 1년 됐거든요. 근데 아직도 모르는 게 많아요. 선배들한테 물어보면 바쁘니까 대충 알려주고. 근데 과장님은 진짜 꼼꼼하게 알려주시잖아요."


"그랬나요?"


"네. 저번에 컬러 그레이딩 질문했을 때 되게 자세하게 설명해주셨잖아요. 그거 진짜 도움 됐어요."


아, 그거. 소희 씨가 영상 색감 맞추는 거 어렵다고 해서 몇 가지 팁 알려줬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20년 하면서 익힌 것들.


"그게 도움이 됐어요?"


"네, 진짜요. 과장님 경험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유튜브에서 못 배우는 거요."





'점심 먹고 회사로 돌아왔다.


슬랙에 김유진 팀장한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김유진] 과장님, 잠깐 통화 가능해요?


통화? 무슨 일이지? 바로 전화했다.


"네, 팀장님."


"과장님, 다음 주에 큰 프로젝트 들어오거든요. 화장품 브랜드 영상인데, 과장님한테 서브로 붙어달라고 하려고요."


드디어 프로젝트다. 첫 실전.


"네, 알겠습니다."


"근데 이 프로젝트가 좀 급해요. 3주 안에 끝내야 하거든요. 괜찮으세요?"


3주. 빡빡한 일정이다. 근데 코러스미디어에서는 이것보다 더 짧은 일정도 소화했다. 2주 만에 30분짜리 홍보 영상 만든 적도 있다.


"괜찮아요. 해볼게요."


"좋아요. 내일 킥오프 미팅 있어요. 오후 2시에 회의실이요."




다음 날, 킥오프 미팅.


회의실에 영상팀 전원이 모였다. 김유진 팀장, 박준호 대리, 한소희 사원, 그리고 나. 네 명이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이번 프로젝트 개요 설명할게요."


김팀장이 화면을 띄웠다. 화장품 브랜드 신제품 런칭 영상. 90초짜리. 감각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원한다고.


"레퍼런스 영상 몇 개 공유할게요."


영상들을 봤다. 요즘 트렌드에 맞는 빠른 컷 전환, 강렬한 색감, 힙한 음악. 20대 타겟인 게 확실했다.


"과장님, 이런 스타일 해보신 적 있어요?"


준호 씨가 물었다. 솔직히 코러스미디어에서는 이런 스타일 잘 안 했다. 거기는 주로 기업 홍보 영상, 다큐멘터리 스타일이었으니까. 근데 못 한다고 할 수는 없지.


"이 정도 스타일이면 할 수 있어요. 컷 전환 속도랑 음악 싱크가 관건이겠네요."


김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장님이 전체 편집 감수 맡아주시고, 준호 씨가 메인 편집, 소희 씨가 서브 편집 해주세요. 저는 클라이언트 커뮤니케이션 담당할게요."


전체 편집 감수. 내 역할이다. 책임이 무겁다.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첫 주는 촬영 원본을 분류하고 스토리보드를 확정하는 작업이었다. 원본 영상이 8시간 분량이었다. 이걸 90초로 압축해야 한다.


"과장님, 이 컷이랑 이 컷 중에 뭐가 나을까요?"


소희 씨가 두 개의 컷을 보여줬다. 비슷한 앵글인데 미묘하게 달랐다.


"음... 이쪽이요. 모델 시선이 살짝 위를 보고 있어서 제품 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돼요."


"아, 진짜네요. 저는 그냥 얼굴이 예쁜 거 골랐는데."


"얼굴이 예쁜 것도 중요하죠. 근데 다음 컷이랑 연결을 생각하면 이쪽이 더 나아요."


소희 씨가 메모했다. 열심히 배우려는 게 보였다.


"과장님, 저 질문 하나만 더 해도 돼요?"


"네, 하세요."


"영상 편집할 때 제일 중요한 게 뭐예요?"


좋은 질문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20년 하면서 배운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거.


"흐름이요."


"흐름이요?"


"네. 기술적인 건 배우면 돼요. 근데 영상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느낌, 그건 감각이에요. 보는 사람이 '어?' 하고 걸리는 순간이 없어야 해요."


"그게 어려운 거 아니에요?"


"어렵죠. 근데 많이 보고 많이 만들면 생겨요. 그래서 경험이 중요한 거예요."


소희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표정이다.


"저도 그런 감각 생길까요?"


"생기죠. 소희 씨 아직 1년차잖아요. 10년 하면 저랑 비슷해지고, 20년 하면 저보다 나아질 거예요."


"진짜요?"


"네. 근데 그러려면 많이 만들어봐야 해요. 이론만 봐서는 안 돼요."




저녁 6시.


퇴근 시간인데 아무도 안 간다. 프로젝트 일정이 빡빡해서다.


"오늘 좀 더 하고 갈게요."


준호 씨가 말했다. 소희 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나도 남았다. 다 같이 야근하는데 나만 갈 순 없으니까.


8시쯤 됐을 때, 소희 씨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 배고파. 저녁 안 먹었는데."


"아, 맞다. 밥 시켜 먹을까요?"


준호 씨가 핸드폰을 꺼냈다.


"뭐 먹을래요? 치킨? 피자? 족발?"


"치킨!"


소희 씨가 외쳤다. 나도 치킨이 좋다.


"과장님은 뭐 드실래요?"


"저도 치킨이요."


"오, 과장님도 치킨파세요?"


"당연하죠. 치킨은 진리잖아요."


소희 씨가 웃었다.


"과장님이랑 취향 비슷해요. 마라탕도 잘 드시고, 치킨도 좋아하시고."


"맛있는 건 세대 상관없죠."


그 말에 다들 웃었다. 분위기가 풀렸다.




치킨을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과장님, 아들 둘이시라고요?"


"네. 중3이랑 중1이요."


"와, 저희보다 조금만 어리네요. 저 98년생이거든요."


소희 씨가 말했다. 98년생이면... 시준이가 2009년생이니까 11살 차이다. 소희 씨가 중학생일 때 시준이가 태어난 거네.


"사춘기라서 힘들지 않아요?"


"힘들죠. 큰애는 말을 안 해요. 방에만 있어요."


"아, 저도 그랬어요. 중고등학교 때 엄마랑 거의 대화 안 했거든요."


"진짜요? 지금은요?"


"지금은 엄마랑 친해요. 주말마다 같이 밥 먹고 그래요. 카톡도 매일 해요."


그 말이 위로가 됐다. 시준이도 나중에 그렇게 되려나.


"근데 과장님."


"네?"


"저 첫날에 '엄마랑 동갑'이라고 했을 때, 기분 나쁘셨어요?"


직접 물어보네. 솔직하게 대답했다.


"솔직히요? 좀 찔렸어요."


"아, 역시... 죄송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사실이니까요. 근데 있잖아요, 소희 씨 어머니도 일하신다며요?"


"네, 은행원이에요."


"그럼 어머니도 저처럼 일하면서 힘드셨을 거예요. 야근도 하고, 눈치도 보고, 가정이랑 일 사이에서 고민하고."


소희 씨가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가끔 그래요. 너 어렸을 때 제대로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고."


"그렇죠. 다들 그래요. 워킹맘은 늘 미안해요."


소희 씨가 나를 봤다. 뭔가 다른 눈빛이었다. 동료가 아니라 엄마를 보는 것 같은.


"과장님도 그런 생각 하세요?"


"매일 해요. 애들한테 미안하고, 남편한테도 미안하고. 근데 일을 안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냥 하루하루 버티는 거죠."


소희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나중에 엄마한테 더 잘해야겠어요."


"그래요. 그거면 됐어요."




야근이 끝나고 집에 왔다.


10시가 넘었다. 오랜만에 야근다운 야근이다. 근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시준이가 거실에서 티비를 보고 있다가 나를 봤다.


"엄마 늦었네."


"응, 일이 좀 있었어."


"밥 먹었어?"


"응, 회사에서 치킨 시켜 먹었어."


"...치킨?"


시준이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부러운 건가?


"주말에 치킨 시켜줄까?"


"...상관없어."


그 말투. '상관없어'가 '먹고 싶어'라는 거 안다. 사춘기 언어는 해석이 필요하다.


"알았어. 주말에 시켜줄게."


시준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안방으로 향했다.


남편이 이미 자고 있다. 살금살금 씻고 누웠다.


핸드폰을 봤다. 인스타그램 알림. 소희 씨가 나를 팔로우한 것 외에도 강예린 씨, 박준호 씨도 팔로우 요청을 보냈다.


수락 버튼을 눌렀다. 어색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저희 엄마랑 동갑이에요.


그 말이 처음엔 비수였는데, 이제는 다르게 들린다. 누군가의 엄마 나이라는 게, 그렇게 나쁜 건 아닌 것 같다. 그 엄마들도 다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나처럼.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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