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차의 어색한 신입 생활
월요일 아침 5시 30분.
알람보다 먼저 눈이 떠졌다. 긴장되면 원래 잠을 못 자는 체질이다. 어젯밤에도 두 시간밖에 못 잤다. 천장을 보다가, 옆으로 눕다가, 다시 천장 보기를 반복하다 눈을 감았다. 하지만 머리에서는 오만가지 생각으로 쉬 잠이 들지 않았다.
첫 출근이다. 47세에 새로운 직장으로의 첫 출근.
20년 전 코러스미디어 첫 출근 날도 이랬었나?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때는 뭣도 모르고 설레기만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크다.
조용히 일어나서 욕실로 갔다. 거울을 봤다. 다크서클이 눈 밑에 걸려 있다. 어우, 피곤해 보여. 컨실러를 발라야겠다. 언제 산 건지도 모르겠는 컨실러가 화장대 한쪽에 있었다.
유통기한은... 3년 전. 괜찮겠지, 뭐.
아침을 차려놓고 아이들을 깨웠다.
시우가 비몽사몽 상태로 식탁에 앉았다가 나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엄마 오늘 어디 가?"
"회사."
"아, 맞다. 오늘부터 출근이지?"
"응."
"근데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났어?"
"긴장돼서 잠이 안 왔어."
"20년이나 일했으면서?"
"20년 일해도 첫 출근은 첫 출근이야."
시준이가 방에서 나왔다. 머리가 새 둥지 같다.
"엄마 오늘 회사 가?"
"응."
"파이팅."
그 한마디 하고 밥 먹으러 앉았다. 사춘기 아들의 '파이팅'은 '사랑해'랑 맞먹는다. 나름 감동.
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8시 40분. 출근 시간은 9시인데 일찍 왔다. 코러스미디어에서는 8시 출근이 기본이었으니까 몸에 배어 있다.
근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분위기가 다를 수 있잖아. 너무 일찍 오면 '오버한다' 소리 듣는 건 아닐까? 요즘 회사들은 유연출퇴근제다, 자율출퇴근제다 하던데.
괜한 생각이 많아졌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들어가자.
사무실 문을 열었다.
시선이 쏟아졌다. 아, 이 느낌. 20년 전에도 이랬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느낌. 근데 20년 전에는 '신입이 왔네' 시선이었고, 지금은... '저분이 새로 온 과장님?' 시선이다. 미묘하게 다르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출근하는 오금이입니다."
인사팀 이서연 씨가 일어나서 다가왔다.
"오금이 과장님, 어서 오세요!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
'과장님'. 같은 직급인데 여기서 들으니까 새롭다. 코러스미디어에서는 그냥 '금이 씨'였는데.
내 자리는 창가 쪽이었다.
모니터 두 대, 키보드, 마우스. 책상 위에 환영 카드가 놓여 있었다. '환영합니다, 오금이 과장님!' 귀엽게 그린 캐릭터도 있었다.
"카드는 디자인팀에서 만들었어요. 신규 입사자분들 오실 때마다 만들어요."
이서연 씨가 설명했다. 코러스미디어에서는 이런 거 없었는데. 그냥 첫날부터 바로 일이었다. '환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슬랙이랑 노션 초대는 메일로 보내드렸고요, 모르시는 거 있으면 편하게 물어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컴퓨터를 켜고 슬랙부터 확인했다. 채널이 많았다. #전체공지, #영상팀, #디자인팀, #마케팅팀, #자유게시판, #점심메뉴...
코러스미디어에서는 이메일이랑 카카오톡으로 다 처리했는데, 여기는 업무용 메신저를 따로 쓰는구나. 뭐, 금방 적응되겠지
옆자리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과장님, 혹시 커피 드세요?"
2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여자분이다.
"아, 네. 마시긴 하는데..."
"탕비실에 커피머신 있어요. 같이 가실래요?"
"그래도 돼요?"
"당연하죠. 저 디자인팀 강예린이에요. 반갑습니다."
"네, 반가워요. 오금이예요."
탕비실로 가면서 예린 씨가 물었다.
"과장님, 저한테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네?"
"여기 수평 문화라서요. 직급 상관없이 다들 '님' 호칭에 존댓말 써요. 과장님이 저한테 존댓말 하셔도 이상한 거 아니에요."
수평 문화. 코러스미디어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아, 그렇구나.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네."
"천천히 하세요. 저도 처음엔 어색했어요."
오전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업무 시스템 익히기, 회사 규정 읽기, 영상팀 소개 받기. 영상팀장 김유진 씨가 팀원들을 소개해줬다. 다섯 명. 다들 30대 초반이거나 20대 후반.
내가 압도적으로 나이가 많다. 나이만.
"오 과장님은 경력이 많으시니까, 적응하시면서 프로젝트 배정해 드릴게요."
김유진 팀장이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생각했다. 빨리 일을 받고 싶다. 손이 근질근질하다.
점심시간이 됐다.
강예린 씨가 다가왔다.
"과장님, 점심 같이 드실래요?"
"어, 그래도 돼요?"
"첫날인데 혼자 드시면 안 되죠."
진짜 좋은 사람이다.
점심은 회사 근처 국밥집이었다.
영상팀에서 세 명, 디자인팀에서 두 명이 함께 갔다. 나 포함 여섯 명.
자리에 앉으니까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됐다.
"과장님, 코러스미디어에서 오셨다고요? 거기 업계에서 꽤 유명하던데."
영상팀 박준호 씨가 물었다.
"네, 20년 있었어요."
"20년이요? 와, 대박. 저 이제 3년차인데."
"과장님, 몇 년생이세요?"
드디어 나왔다. 이 질문.
"78년."
잠깐 정적이 흘렀다. 계산하고 있는 거겠지.
"우와, 저희 엄마랑 동갑이에요!"
영상팀 막내 한소희 씨가 말했다. 표정이 밝다. 악의는 없는 것 같은데.
가슴에 비수가 꽂혔다. 엄마랑 동갑이래. 엄마.
"그, 그렇구나."
"저희 엄마도 78년인데 아직 회사 다니세요. 은행원이에요. 엄마가 일하는 거 보면서 저도 오래 일해야겠다 생각했어요."
분위기가 살짝 바뀌었다. 소희 씨 말투가 진심이었다.
"고마워. 그 말 들으니까 힘이 나네."
강예린 씨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과장님, 뭐 드실래요? 여기 순대국이 맛있어요."
"순대국으로 할게요."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가 나왔다.
"과장님, 회사 분위기 어떠세요? 코러스미디어랑 많이 달라요?"
"음... 많이 다르네요. 거기는 위계질서가 확실했거든요. 팀장이 부르면 뛰어가야 했고."
"헐, 진짜요?"
소희 씨가 눈을 크게 떴다.
"응. 커피 심부름도 막내 몫이었고. 회의 때 팀장 말에 토 달면 큰일 났어."
"와... 드라마 같은데요?"
드라마. 그게 내 일상이었는데. 여기 사람들한테는 드라마인 거다.
"여기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요. 좋은 의미로."
"저희 회사가 그래도 수평적인 편이에요. 최본부장님이 그런 거 싫어하셔서."
예린 씨가 말했다. 최민재 본부장. 면접 때 본 그분. 좋은 사람 밑에서 일하게 됐나 보다.
오후.
슬랙에서 멘션이 왔다.
[김유진] @오금이 과장님, 잠깐 회의실로 오실 수 있어요?
회의실. 무슨 일이지? 첫날부터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
회의실로 들어가니 김유진 팀장이 노트북을 열어놓고 있었다.
"오 과장님, 앉으세요."
"네."
"첫날이라 정신없으시죠?"
"네, 좀... 적응 중이에요."
"부른 건 다른 게 아니라, 프로젝트 하나 보여드리려고요."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영상 기획안이었다.
"이번에 진행 중인 브랜드 영상이에요. 러프컷이 나왔는데, 과장님 눈으로 한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뭔가 아쉬운데 뭔지 모르겠어서요."
"제가요?"
"네. 20년 경력이시잖아요. 저희가 못 보는 게 있을 것 같아서."
첫날부터 일이다. 근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천천히 적응하세요'가 아니라 '일 해주세요'라는 게.
"네, 보여주세요."
영상을 봤다.
3분짜리 브랜드 영상.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았다. 근데 몇 군데 아쉬운 점이 보였다.
"여기, 1분 20초쯤에 컷 전환이 좀 급해요. 인터뷰가 끝나기 전에 화면이 바뀌어서 끊기는 느낌이 있어요. 0.5초만 더 여유를 주면 자연스러울 것 같아요."
"오, 어디요?"
다시 재생해서 보여줬다.
"아, 진짜네요. 저는 수십 번을 봤는데 못 봤어요."
"보다 보면 눈이 익숙해져서 그래요. 다른 사람 눈이 필요한 이유가 그거예요."
"그리고 혹시 다른 건요?"
"2분 10초쯤에 음악 볼륨이 살짝 튀어요. 여기서 페이드 인 타이밍을 0.3초 정도 앞으로 당기면 부드러워질 것 같아요."
김유진 팀장이 해당 부분을 다시 들었다.
"와, 소리까지 캐치하셨어요?"
"20년 하면 들려요. 밤새 편집하면서 훈련된 거예요."
김유진 팀장이 웃었다.
"과장님 모셔오길 잘했다. 진심으로요."
그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 나 여기서 필요한 사람이구나.
퇴근 시간이 됐다.
6시.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과장님, 퇴근하세요. 첫날이니까 푹 쉬세요."
김유진 팀장이 말했다.
"네? 벌써요?"
"벌써라뇨, 6시예요."
코러스미디어에서 6시는 퇴근 시간이 아니었다. 6시부터가 본격적인 야근의 시작이었다. 팀장 눈치 보면서 8시, 9시까지 버티는 게 일상이었는데.
"여기는... 진짜 6시에 퇴근하는 거예요?"
"네. 급한 프로젝트 있으면 야근하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정시 퇴근이에요. 최본부장님이 칼퇴 문화 만드신 거예요."
칼퇴 문화. 그런 게 있구나.
"그럼... 먼저 가볼게요."
어색하게 인사하고 나왔다.
지하철을 타면서 핸드폰을 봤다.
[정우] 오늘 어땠어?
[나] 살아남았어.
[정우] ㅋㅋㅋ 고생했어. 저녁 뭐 먹을까?
역시 밥이다.
[나] 집에서 해먹자. 나 6시에 퇴근했어.
[정우] ??????
[정우] 6시에?? 야근 없이??
[나] 응. 여기는 칼퇴 문화래.
[정우] 와... 신세계네.
신세계가 맞다. 20년 만의 6시 퇴근이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봤다. 해가 아직 안 졌다. 퇴근하는데 해가 있다. 코러스미디어 다닐 때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집에 가면 저녁 차리고, 아이들이랑 밥 먹고, 티비도 보고... 시간이 남겠다. 이런 게 삶인가?
"엄마랑 동갑이에요."
소희 씨 말이 떠올랐다. 가슴이 쓰렸다. 근데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그래, 그 엄마도 아직 일하고 있잖아. 나도 할 수 있어.
슬랙 사용법, 노션 정리법, 수평 문화. 새로 배울 것들이 있다. 근데 영상 앞에서는 내가 더 많이 안다. 그거면 됐다.
오늘 하루 버텼다. 내일도 버티면 된다.
월화수목금금금. 다시 시작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