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70%, 자존심 100%
면접 전날 밤.
거실에서 면접 예상 질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지원 동기가 뭔가요', '본인의 장단점은'...
시준이가 방에서 나와서 냉장고를 열다가 나를 봤다.
"엄마 뭐 해?"
"면접 연습."
"... 혼자서?"
"응."
시준이가 냉장고 문을 닫고 나를 빤히 봤다.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다.
"뭐?"
"아니... 그냥... 좀 무섭게 생겼어."
"뭐가?"
"표정이. 면접관이 보면 무서워서 도망갈 것 같은데."
거울을 봤다. 진짜 무섭게 생겼다.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고, 입꼬리가 내려가 있다. 이게 20년간 박팀장 밑에서 일하면서 굳어진 표정인가.
"... 고마워. 덕분에 알았어."
시준이가 어깨를 으쓱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사춘기 아들의 직설화법. 독하지만 효과는 있다.
면접 당일 아침.
옷장 앞에서 또 고민이다. 지난번 면접에서 나만 정장이었던 악몽이 떠올랐다.
캐주얼하게 갈까? 근데 크리에이티브웍스는 규모가 좀 있는 회사라고 했으니까... 너무 캐주얼하면 또 이상하고...
시우가 지나가다가 멈췄다.
"엄마 뭐 해?"
"뭘 입을지 고민 중."
시우가 옷장을 훑어봤다. 중1인데 패션에 관심이 많다. 유튜브로 코디 영상 같은 거 보더라.
"그 검은색 말고."
"왜?"
"장례식 가는 것 같아."
... 이 집 남자들은 왜 다 독설가인 거지?
"그럼 뭘 입어?"
시우가 옷장을 뒤지더니 베이지색 재킷이랑 흰색 블라우스를 꺼냈다.
"이거. 청바지 말고 슬랙스랑 입어. 캐주얼한데 깔끔해 보여."
"... 너 언제 이런 거 배웠어?"
"유튜브."
역시 유튜브는 인류의 스승이다.
크리에이티브웍스는 마포구에 있었다.
건물 외관부터 달랐다. 강남의 번쩍번쩍한 회사들과 다르게 차분한 느낌이었다. 로비에 들어서니 큼직한 로고 옆에 회사가 제작한 영상 포스터들이 걸려 있었다.
어, 저거 봤던 건데? 작년에 화제 됐던 다큐멘터리 아닌가? 이 회사가 만든 거였어?
긴장이 더 됐다. 생각보다 유명한 회사잖아.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들어갔다. 면접관은 세 명이었다. 두 명은 30대 중반쯤 돼 보이고, 한 명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50대 초반?
"안녕하세요, 오금이 님. 편하게 앉으세요."
50대 남자분이 말했다. 목소리가 부드럽다.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저는 콘텐츠본부장 최민재입니다. 옆에는 영상팀장 김유진 씨, 인사팀 이서연 씨예요."
본부장이 직접 면접을 본다고? 과장 면접에?
면접이 시작됐다.
"이력서 인상 깊게 봤어요. 코러스미디어에서 20년이면 거의 회사 역사랑 같이 하셨네요."
"네, 입사 초기부터 함께했습니다."
최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여쭤볼게요. 왜 나오셨어요?"
직접적인 질문이다. 근데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았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것 같았다.
"구조조정이었습니다. 파견 형태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계약이 종료되면서..."
"아, 그런 상황이었군요."
표정이 달랐다. 지난 면접들에서 봤던 '아, 잘렸구나' 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뭐랄까, 이해한다는 표정?
"저희 회사가 어떤 곳인지는 아시죠?"
"네, 다큐멘터리랑 브랜드 영상 제작 회사로 알고 있습니다. 작년에 나온 '도시의 밤' 다큐멘터리도 여기서 만드신 거 맞죠?"
최본부장이 웃었다. 첫 번째 미소다.
"맞아요. 보셨어요?"
"네, 편집이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인터뷰 컷 전환할 때 음악 싱크 맞추신 부분이요."
"오, 그걸 캐치하셨네요."
영상팀장 김유진이 끼어들었다.
"저 그 부분 편집했거든요. 다들 모르고 넘어가는데."
"20년 편집하면 보여요. 고생하셨겠다, 싶은 부분들이."
김유진 팀장이 피식 웃었다. 분위기가 좀 풀렸다.
기술적인 질문들이 이어졌다.
"프리미어 외에 다른 툴은요?"
"애프터이펙트,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다 쓰고요. 다빈치 리졸브도 기본은 합니다."
"촬영도 하신다고요?"
"네, 코러스미디어에서는 원맨 체제라서... 기획부터 촬영, 편집까지 다 했어요."
최본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이력서 보니까 '담당' 항목에 오 과장님 이름이 별로 없던데요?"
심장이 쿵 했다. 이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근데 막상 들으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팀장이 제 성과를 다 가져갔어요'라고 하면 뒷담화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고.
"... 팀 프로젝트라서 팀장님 명의로 올라간 경우가 많았습니다."
최본부장이 나를 봤다. 몇 초간 시선이 마주쳤다. 뭔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경우 있죠. 저도 겪어봐서 알아요."
그 한마디에 뭔가 뭉클해졌다. 모르는 척 넘어가 줄 수도 있었는데, 알아봐 준 거다.
면접이 끝나갈 무렵,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쭤볼게요. 47세에 다시 시작하는 거, 어떠세요?"
어떻냐고? 솔직히? 무섭고, 막막하고, 자존심 상하고, 가끔은 포기하고 싶다. 근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근데 입에서 나온 말은 달랐다.
"암 수술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면접관들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 이 얘기를 왜 꺼냈지.
"올해 초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거든요. 다행히 초기라서 지금은 완치됐고요. 근데 병원 천장 보면서 생각했어요. '내가 뭘 하고 살았지?' 20년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남은 게 뭔가 싶더라고요."
말하다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르게 해 보려고요. 예전에는 시키는 대로만 했는데, 이제는 제 이름 걸고 일하고 싶어요. 47세가 늦었다고 생각 안 해요. 오히려 지금이 딱 좋은 것 같아요. 잃을 것도 없고, 건강도 이겼으니까."
말을 마치고 나서 후회했다. 너무 길게 말했나? 암 얘기를 왜 했지? 마이너스 요인 아닌가?
근데 최본부장이 웃었다.
"좋네요. 그 마인드."
면접이 끝났다.
회사 건물을 나오면서 핸드폰을 봤다. 남편한테 카톡이 와 있다.
[정우] 면접 끝났어? 밥은 먹었어?
[나] 이제 끝났어. 괜찮았던 것 같아.
[정우] 다행이다. 저녁 뭐 먹을까?
이 사람은. 결국 밥이다. 모든 대화의 결론은 밥.
[나] 아무거나. 집에서 해 먹자.
[정우] 알았어. 내가 장 볼게. 뭐 사갈까?
[나] 삼겹살.
오늘은 고기다. 면접 잘 봤으니까. 아마도. 아니, 잘 본 것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3일 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두부를 고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
또 스팸인가? 요즘 대출 전화가 하도 와서.
"여보세요?"
"오금이 님 되시죠? 크리에이티브웍스 인사팀입니다."
손에 들고 있던 두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 네! 네, 맞습니다!"
목소리가 너무 컸나?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쳐다본다.
"면접 결과 알려드리려고 연락드렸는데요."
심장이 쿵쿵쿵 뛴다. 됐나? 안 됐나? 제발.
"합격이십니다. 축하드려요."
... 뭐라고?
"네?"
"합격이요. 오금이 님, 저희 크리에이티브웍스에서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마트 두부 코너 한가운데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여전히 쳐다보고 있다. 나 왜 울어, 두부 앞에서.
"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처우 협의 때문에 한 번 더 뵈어야 하는데, 이번 주 금요일 가능하세요?"
"네! 가능합니다! 몇 시든 가능합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서 있었다. 합격. 합격이라고 했다. 진짜?
두부를 집어 들었다. 아니, 오늘은 두부 말고 소고기다. 합격 기념이니까.
금요일, 처우 협의.
인사팀 이서연 씨랑 마주 앉았다. 서류가 한 뭉치 놓여 있다.
"연봉 말씀드릴게요."
이 순간이 왔다. 심호흡.
"저희가 제시할 수 있는 금액은 3,400만 원입니다."
3,400만 원. 코러스미디어에서 받던 4,200만 원의 약 80%.
생각했던 것보다 높았다. 70%까지 각오했는데.
"성과에 따라 인센티브도 있고요. 입사 후 6개월 지나면 연봉 재협상 가능합니다."
"... 감사합니다."
"괜찮으세요?"
이서연 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마 내 표정이 묘했나 보다.
"네, 괜찮아요. 사실 더 낮을 줄 알았어요."
"최본부장님이 '경력값을 제대로 쳐드려야 한다'라고 하셨어요. 20년 경력을 신입 대우 할 수는 없다고."
그 말에 또 눈물이 날 뻔했다. 여기서 울면 안 돼. 제발. 두부 코너에서 한 번 울 뻔했으면 됐지.
"출근일은 다음 주 월요일로 하면 될까요?"
"네, 가능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 6일 뒤. 새 출발.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말했다.
"나 취직됐어."
남편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짜? 어디?"
"크리에이티브웍스. 마포에 있는 영상 제작 회사야."
"오! 축하해! 연봉은?"
역시. 밥 다음은 돈이다. 이 집 대화 주제는 밥 아니면 돈이다.
"3,400."
"... 전보다 적네."
"당연히 적지. 근데 어때. 0원보다 낫잖아."
남편이 웃었다. "그래, 그렇지. 축하해, 여보."
시우가 끼어들었다.
"엄마 취직됐어? 대박! 이제 용돈 올려줘!"
"연봉이 줄었는데 왜 용돈이 올라가?"
"취업 축하 보너스?"
이 녀석은 진짜.
시준이가 방에서 나왔다. 이어폰을 한쪽만 빼고.
"취직됐어?"
"응."
"... 축하해."
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이어폰을 빼고 나온 것만으로도 감동이다. 사춘기 아들에게 이 정도면 최고의 축하다.
남편이 말했다.
"오늘 외식하자. 삼겹살 어때?"
"아니, 나 소고기 샀어. 마트에서 합격 전화받고 바로 샀어."
"소고기? 우리 집에 무슨 일이야?"
"취직. 취직이 일이지."
그날 저녁, 오랜만에 온 가족이 같이 밥을 먹었다. 소고기는 비쌌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47세, 새 시작.
암도 이겼고, 취업도 했다.
이제 뭐가 남았지?
아, 맞다. 첫 출근. 그게 남았다.
... 긴장되기 시작한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