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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ddar Mar 20. 2022

꿈속의 제주

What can you do for yourself?

15. 3. 30. 월요일

오전 열 시 반에 집에서 나선 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렸다. 들뜨는 마음이 여기저기 떠다녔다. 열한 시 사십 분이 넘어서 공항에 도착했는데, 아침에 지연 문자를 받고 아예  더 일찍 가서 비행기 시간을 앞당길 생각을 했던 터라 조금 속이 상했다. 항공사에 부탁해 보니 두시 사십 분으로 앞당겨줄 수 있다고 했다. 원래 한시 비행기였는데.. 그래도 이게 어디냐 하고 기다렸으나 또 한 번 지연 소식이 들려왔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덤덤하고자 했지만 흔들리는 비행기도 뿌연 창문도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겨우 도착한 시간은 다섯 시에 가까웠다. 버스를 갈아타고 구좌초등학교 앞에 내렸다.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타서 돈을 더 냈다.) 구름 가득한 날의 월정리는 기대에 못 미쳤다. 그냥 '제주에 있다.'라는 걸로 만족하고 위로했다. 어둑어둑.. 해가 질 즈음 게스트하우스에 도착. 다들 친절했지만 왠지 모르게 경계가 됐다.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다가 일찍 누웠다. 머리맡에 제주 여행기가 담긴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밤이었다. *


스물두 살, 난생처음 혼자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위해 휴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다들 프랑스나 미국처럼 꽤 거리가 있는 목적지를 예상했으나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은 제주도였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충분한 돈을 모으는 게 여의치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스물둘의 나는 어느 때보다 단념에 익숙했다. 기대에 부풀어 활력을 얻는 것보다 빠르게 가능성과 타협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상황보다는 마음의 문제였지만, 당시에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것이 참 어려웠다. 그때 나의 바람이 너무 소박했던 게 뒤늦게 아쉽기도 하다. 어쩌면 오기에 가까운 열망을 불태워 기어이 유럽 땅을 밟을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나에게는 불태울 만한 열망 같은 게 없었다. 나는 악착같이 살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랑 같이 살던 유년기에 우리는 사소한 일로 다투곤 했다. 정리를 잘해라. 집이 좁아요. 언니랑 싸우지 말아라.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가끔 감정이 상하기는 해도 금방 해결되었다. 반복된다는 사실이 가장 큰 단점이었지만, 그래도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 할머니가 먼 지방으로 이사를 가신 뒤부터는 그마저도 없어졌다. 매일 좋은 말만 주고받다가 사랑한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전화를 하다가 제주도에 가는 계획을 말씀드렸는데, 할머니는 같이 살 때 다퉜던 어떤 순간보다 크게 화를 내셨다. 상황이 안 좋은데 혼자서 여행을 꼭 가야 하냐는 거였다. 방학 동안의 아르바이트 월급을 내놓고,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매번 생활비 대출을 받아야 했던 나는 좀 억울했다. 어릴 때부터 철이 일찍 들었다고 생각해왔던 내가 한순간에 집안의 철부지가 되어 있었다.


아직도 그날의 통화를 기억한다. 나는 집 앞에 있는 백화점(이름만 백화점이지 마트에 가까운) 1층을 통과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네가 지금 즐겁게 여행을 갈 때냐”라고 물으셨다. 그럼 지금이 어떤 때인데요. 우뚝 서서 생각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사실 나는 숨 쉬러 간 거였다. 며칠이라도 혼자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 고집대로 여행을 갔고, 그 일로 한동안 할머니와 서먹하게 지내야 했다. 불편하고 찝찝한 승리를 거둔 느낌이었다. 유럽에 가겠다고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둥의 말을 우스개로 중얼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날의 대화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마음 한편에 남아있었다. 맛있는 걸 먹을 때, 친구들과 놀러 갈 때, 사고 싶은 것을 떠올릴 때면 늘 안개 같은 죄책감에 휩싸였다.


할머니가 나의 행복을 방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일에 서툴렀던 거다. 내가 웃어도 되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숱한 날을 허비했다. 할머니는 평생 본인보다 가족이 먼저였던 분이니까 당연히 집안의 분위기나 형편이 먼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맞았다. 얼마 살지 않았지만, 내가 지켜본 바는 그렇다. 잠깐 혼자 행복해도 큰일 나지 않고, 오히려 각자의 행복을 찾아야 앞으로의 고된 날을 함께 이겨낼  있더라. 제주에 다녀온 내가  힘을 내서 사랑한 것처럼, 여전히 그날을 추억하며 견디는 것처럼 말이다. 함께 행복을 만드는 방법을 몰랐던 할머니와 혼자만의 행복에 눈치를 봤던 나는  이상 서로 미안해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행복을 위해 응원을 보낼 . 언젠가 할머니와 함께 제주에 가고 싶다.



   


* 나의 일기, 제주 여행에 들떠서 노트에 기록해뒀다. 첫날 이후로는 일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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