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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ddar Mar 13. 2022

나의 사랑, 나의 신부

She is no longer Stella

21. 1. 16. 오전 11시경

어제 밤을 꼬박샜다.
내가 20세때 섬기던 시조시인 하한주 신부님이 생각이나 내이버에 들어 갔더니 그 신부님의 기록이 있어 그분과 랑데부 하느라 날밤을 샜다. 얘기꺼리가 줄줄이 엮여 나왔다. 지금은 목사의 아내가 돼었지만 그때는 천주교 신자였다. 내가 고 윤을수 신부님께서  창설한 구산후생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여 수학중에 하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다. (구산학교는 수녀반과 사회사업반 으로 구성됀 인보성체 수녀원의 모태이며 원년이다.)

2년 학기를 마치고 평택 성당에서 약 일년 넘게 모시게 되었는데 신부님이 먼저 평택에 계시고 난 학업 중이라 토요일에 평택을 갔다. 뻐스를 타고 오산쯤 가면  하늘이 보이지 않은 푸라타너스의 가로수 길을 지난다. 어찌나 울창하고 멋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때 생각에 잠겨 몇자 썼던 글을 신부님께 드렸더니 1958년 카톨릭청년 월간지에 박 스텔라 (영세명) 이름으로 실렸다. 제목이 "생각하고싶다" 인것같다.

그때 이미 내속에 신부님이 시라는 씨를 심으셨나 보다. 또 함께 지냈던 신부님 비서 강 토마스 신학생은 수사신부로 내정되어 독일로 가야할 분인데 철없는 내가 그분을 사랑 하게되어 고민 하는걸 신부님이 눈치 채시고 나의 첫사랑을 갈라 놓으셨다. 강 신학생의 흔들림도 아셨기에 서둘러 나를 고향으로 보낼때에 부평초라는시를 써 주셨는데 얼마나 울었던지 그것은 안중에도 없어 간수를 못했다.

하마터면 한 신부의 일생을 망칠번한 사건이 주마등 처럼 스쳐 살며시 그분도 네이버에서 찾아 보느라 뜬 눈으로 밤을 샜다. 추억 속에 들어가 기억을 더듬어 보니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나며 사랑에 빠저 가슴 절절이 말못하고 애태웠던 내 모습에 미소가 지어진다.

벅찬 과거에 설레이다 날밤 새고 새벽 5시넘어 잠을 청했으나
여전히 오후 5시가 넘도록 뜬 눈이다...*


이십 대 초반의 할머니는 '스텔라'라는 세례명으로 불렸다. 열일곱에 어머니를 잃은 소녀에게 새엄마는 냉정하게만 느껴졌고, 온기 없는 집안을 견딜 수 없어 매일 거리를 배회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가끔 집에 찾아오던 수녀님들이었다. 다정하고 지혜로워 보이는 사람들이 신을 믿는다고 하니까 소녀의 마음속에도 옅은 신뢰와 함께 궁금증이 자리 잡았다. 짧지 않은 방황기의 결과로 학업을 온전히 이행하지 못했지만 성당을 열심히 다니며 삶에 생기를 더해갔다. 그러던 중 착실함과 열정이 눈에 띄었는지, 신부님의 권유로 '구산 후생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할 때쯤, 토마스를 만났다.


토마스를 학교에서 만난 건 아니었다. 스텔라의 졸업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어떤 신부님을 모시러(지금으로 치면 비서와 같은 역할) 타지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 토마스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도 비서의 역할을 했지만 엄연한 예비 수사였다. 스텔라는 아직 학생 신분이었으므로 초반에는 주말에만 들렀고, 졸업 후에 그곳에서 지낸 시간까지 다 합쳐도 1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자신의 삶을 신께 드리기로 서원한 토마스와 이제 갓 학교를 졸업한 스텔라 사이에는 연결고리보다 장애물이 더 많았지만, 파릇파릇한 두 청춘이라면 매일같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언제 어떻게 사랑이 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노릇이었다.


스텔라는 자신의 사랑이 일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는 토마스는 도도하고 차가웠으며, 거만하다고 인식될 만큼 남에게 곁을 잘 주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 이렇게 사랑의 마음이 커진 건지 뜨거운 돌덩이를 삼킨 것처럼 점점 참기 힘들어졌다.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백하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아서, 차라리 영원히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도도한 사람을 왜 좋아했냐는 나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잠깐씩 비추는 미소에 반한 것 같아."라고 말했다.


시간이 흐르고 둘 사이에도 유대감을 뛰어넘는 어떤 감정이 생겼다. 아마도 뜨거운 돌덩이를 속에 품었으니 얼굴이 자주 빨개져서 들키지 않았을까 싶다. 제삼자가 목격하고 관여할 지경이었으면 은은하게 티가 난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언젠가 토마스가 스텔라에게 자신이 신부의 길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비로소 서로의 마음이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스텔라와 토마스, 어린 두 청년은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평생 동안 토마스를 만나기는커녕 소식 한 줄도 듣지도 못했다. 이름, 나이, 사는 곳도 모르고 아는 거라고는 성씨 밖에 없는 사람을 무슨 수로 찾겠는가. 주임신부님의 권고로 그곳을 떠나면서 주임신부님께서 남겨주신 시 한 편에 울었던 기억뿐, 그 시의 구절조차 허공으로 흩어졌다. 부평초.* 제목만 남은 시가 스텔라의 마음에 새겨져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 시를 쓰게 하였다. 이제 할머니의 가슴속에 그때의 뜨거운 돌덩이는 없지만 시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름답게 꽃 피었다.


가끔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할머니는 웃으며 말해주신다. "내가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방을 쓰는 빗자루로 바이올린을 켜는 시늉을 해주던 사람이었어." 다른 건 다 흐릿해도 그 장면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는 할머니. 스물한 살 스텔라의 마음에 새겨진 시, 육십오 년 넘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예쁜 꽃의 씨앗은 어쩌면 토마스의 미소였는지도 모르겠다.



* 할머니의 일기, 휴대전화 메모장에 직접 작성하셨다. (오탈자는 고치지 않았다.)
* 부평초 (浮草) 2. 물 위에 떠 있는 풀이라는 뜻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를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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