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in't never had a friend like You
나는 아빠의 둘째 딸이고 아빠는 할머니의 둘째 아들이다. 할머니가 아빠를 스물여섯에 낳으셨다고 하니 아빠 위로 두 살 터울의 고모는 스물넷에 낳았겠다. 스물넷. 그 시절이라면 부모가 되기에 그리 이른 나이도 아니었겠다만, 5년 전의 나를 대입하려고 들면 상상조차 쉽지 않다. 스물넷의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 대학생이었다. 누군가를 책임지기는 커녕 내가 되려 짐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발버둥 치던 시절. 자주 우울감에 젖었으나 무너지지 않은 것만으로 어른스러운 성장이었다고 자부했는데, 같은 나이의 할머니는 엄마가 되었구나. 엄마가 된 할머니의 나이에서 다섯 살을 더 먹고 나서야 약간의 조급함이 생긴다. 우리의 이야기를 쓰는 일을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
할머니와 나 사이에는 58년의 공백이 있다. 할머니는 나라는 존재 없이 60년 가까이 사신 거다. 아득한 시간의 굴레 안에 얼마나 많은 일이 얽히고설켰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듣고 또 들어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모든 사건이 과거가 지금에서야 지난날들을 소설 속 몇 개의 챕터로 추려볼 수 있지만, 나의 평생을 두 번 더한 만큼의 세월이니 결코 간단히 정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감히 짐작하건대, 내가 등장함으로써 할머니의 삶이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으리라. 자신을 빼다 박은 분신이자 완전한 타자이고, 가장 열렬한 아군이자 한없이 메마른 관찰자인 존재. 우리는 서로에게 여태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한 대상이다. 가끔은 할머니는 나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은 할머니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가 나를 받아주잖아, 고마워." 전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할머니 말씀을 제일 잘 들어드리지. 영화 <알라딘>에서 지니가 알라딘에게 불러준 노래의 가사, "you ain't never had a friend like me(나 같은 친구는 없었지)"처럼 늘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 같은 손녀는 없지?" 그런데 그것뿐일까. 알라딘에게도 지니 같은 친구가 없었던 게 맞지만, 알라딘이야말로 지니의 유일한 구원자였다. 지니가 만났던 수많은 '주인님들'과 달리, 알라딘은 '친구로서' 진정한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우리 할머니가 읽으시면 "지니가 누구니?" 하고 물으시겠지. 그럼 나는 20분 동안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어렵지 않다. 할머니야말로 나에게 진짜 다신 없을 친구니까.
대입을 위한 면접을 치르던 당시,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나는 주저 없이 할머니라고 대답했다. 그때의 질문을 다시 받는다고 해도 대답은 그대로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할머니이다. 선망이나 동경보다는 인정과 존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대단한 업적을 이뤄내거나 영웅적인 행보를 가져서가 아니라, 할머니가 늙지 않는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 할머니는 마당에 난 풀 한 포기로 울고 웃을 수 있는 소녀이자, 본인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어른이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청춘이다. 고집으로 딱딱하게 굳어가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어김없이 상처받고 기어코 회복해내는 사람. 나는 이렇게 건강하게 성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여든일곱에 접어든 할머니를 보는 스물아홉의 나에게 소감은, 솔직히 특별한 생각이 없다. 그냥 할머니가 살아온 생애에 1년이 더해지는구나 싶다. 내가 지켜봐 온 할머니는 나이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분이 아니었다. 궁전에서나 초막에서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상황에 굴하지 않고 잘 지내실 분이다. 다만 달라지는 점이 있다면 그건 할머니의 영혼이 날마다 새로우리라는 사실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올해와 내년이 다르다. 할머니의 성장은 아흔이 되어도 백수가 되어도 다를 바 없을 거다. 그리고 할머니의 고군분투를 향한 나의 응원도 계속될 것을 약속한다. 60년을 뛰어넘는, 둘도 없는 친구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