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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ddar Apr 11. 2022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two wedding and a funeral


<텅 빈 집>

  여보, 집을 떠나 천국여행 즐거워요? 같이 가자 하시던 그 말씀이 귀에 들려 울고있답니다. 가실 때는 외로웠지만 지금쯤은 그토록 뵙고 싶던 주님 영접받고 천국 잔치 열렸겠네요! 사랑하시던 사모님들도 만나셨고요? 면류관 쓰시고 황금길 걸으시는 것 보고 싶네요~!  

  “여보~”하면 “왜~”하시던 그 음성을 이제는 들을 수 없고, 언제나 곁에 있던 당신의 온기도 느낄 수 없지만.. 내 마음속에 계신 당신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당신 곁으로 다가갑니다~!  비록 짧은 세월이었지만 그랬기에 더 더 절실한 시간 이었습니다. 주님이 중매 하셨기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나날이 었답니다.  우리가 만날 때에 모두 웃었지만 난 당신을 통해 늦게나마 영글어가는 삶을 살았답니다. 감사해요. 많이 사랑했답니다.  

  당신의 소천으로 당신의 삶 전부를 봤네요.삶 속에서 단면만 봤는데, 가신 뒷자리에 남겨진 후담을 통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들었고 봤습니다. 존경합니다. 그런분을 모시게 됨은 행운입니다. 당신께 누가 되지 않도록 남은 여생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인천 할아버지, 일산 할머니

할아버지 하면 인천 할아버지부터 생각난다. 어린 손주들을 무릎에 앉혀 놓고 가만히 계시기를 좋아하시던 할아버지. 마르고 힘없는 피부에 겹겹이 주름이 깊게 파여 있던, 이미 깊게 파인 주름이 더 깊어지도록 천천히 미소 지으시던 할아버지.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말에 대한 기억이나 소리에 대한 감각이 없는데, 그건 시간이 오래 지나서 흐려진 것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할아버지가 말수가 적은 분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는 추측이 조금 더 믿음직하다. 나는 할아버지를 만나러 인천에 가는 걸 좋아했다. 인천 할아버지는 엄마의 아버지이다.


아빠의 아버지, 그러니까 일산 할머니의 남편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는 홀로 계셨고, 결혼 생활 같은 이야기는 해주신 적도 없었다. 인천 할머니는 이미 엄마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로 인천 할아버지도 눈을 감으셨으니 나에게는 오래도록 일산 할머니 한 분뿐이었다. 그러니 '친'이나 '외' 같은 불균형한 글자 따위는 붙일 필요가 없었다. 인천 할아버지와의 기억이 아무리 좋았다고 해도 살을 맞대며 함께 살아낸 일산 할머니와는 비교할 수 없다. 나에게 일산 할머니는 사랑과 미움, 존경과 연민이 뒤엉킨 진짜 가족이니까.

 

할머니와 나 사이에는 비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묻힌 말은 있었다. 바로 아빠의 아버지, 할머니의 남편 이야기다. 내가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처음 말을 꺼내셨다. 그 전에는 그냥 일찍 사별을 하셨겠거니 미루어 짐작하고 지냈으나 알고 보니 할머니의 결혼생활의 결말은 이혼에 가까운(도망을 치셨다고 하니) 이별이었다. 나중에 멀리서 돌아가셨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고 한다. 아직도 할머니에게 결혼, 이별, 사랑 같은 단어를 붙이는 게 어색한데, 할머니와 함께 살던 청소년기에 그런 개념을 떠올리는 건 상상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니 중학교 1학년 때 할머니의 재혼 소식을 들은 나는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공주 할머니

처음에는 그저 멀리 이사를 가신다는 뉘앙스만 풍겨왔다. 어른들끼리 오고 가는 대화에 결혼이라는 단어가 섞여 있었는지는 몰라도 내가 알아챌 정도로 자주 언급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중에 누군가의 입을 통해 ‘결혼’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결혼이라니, 게다가 나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미 결정된 일에 나의 의견은 아무 힘이 없다니. 내가 펼칠 수 있는 의견 피력이라고는 그저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표출하는 것 밖에 없었다.


결혼 상대는 공주에 사시는 원로 목사님이셨다. 말은 결혼이라고 해도 연세가 많아 노쇠하신 어르신을 모시는 거라고 엄마는 나를 달랬으나 그런 말로 달래질 중학생이 아니었다. 단단히 뿔난 표정을 하고 나의 할아버지가 될 분을, 아니 된 분을 뵈러 갔다. 백발마저도 몇 가닥 남지 않은 할아버지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연세가 많은 분이었다. 누군가의 부축 없이는 걷는 것도 힘들어하셨는데 성량은 건장한 청년도 이길 정도였다. 목소리가 크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만큼 나는 그분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몇 년 동안 나는 그분을 목사님이라고 불렀다.


할머니의 '섬김'은 점점 결혼 생활을 모방했다. 여보라고 부르거나, 사모님이라고 불리거나 하는 식의 변화가 있었다. 우리 할머니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목사님의 아내라고 소개된다고 생각하니 할머니를 빼앗긴 기분이었다. 할머니에게 새로운 자녀들이 생기는 것도, 명절마다 할머니가 다른 가족들과 함께하는 것도 싫었다. 미운 마음이 속에서 삐져나와서 잘못 없는 할아버지에게 괜히 심술을 부리곤 했다. 어른들 몰래 흘겨보거나 대답을 안 하고 딴청을 피우는 걸로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할아버지는 다 알고 계셨을 것 같다.



두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장례

할머니는 한 번도 결혼식을 올린 적이 없다. 첫 번째 결혼은 등 떠밀려 혼인신고부터 하고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하지 못했고, 두 번째 결혼은 아흔이 가까운 신랑과 일흔을 갓 넘긴 신부의 결혼이었기에 요란스러울 필요가 없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가족끼리 모여서 혼인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데, 우리 가족은 초대받지 못했으므로 나에게는 없는 기억이다. 왜 우리 가족을 초대하지 않았는지는 할머니에게 묻지 않았다. 그날의 분위기가 어땠을지 이제 와서 조금 궁금해진다.


재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두 분은 꽉 찬 13년을 가족으로 사셨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두 분의 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 시점부터 할아버지를 향한 마음에는 미움보다 연민을 근거한 친근감이 자리 잡았고, 나는 할아버지를 진심으로 꼭 안아드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보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이 훨씬 길었다. 그 시간을 반전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을 정도로 두 분 사이에는 깊은 신뢰와 사랑이 있었음을 확신한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공주 할아버지께 감사드린다. 공주에서 보낸 십수 년의 세월 동안 우리 할머니는 행복과 슬픔, 존경 받음과 비참함을 남김없이 경험하며    성장하셨다. 그리고  마음 밭에는 분명, 할아버지에게 받은 사랑과 할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덟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서서히 깨달았다. 할머니의 결혼 생활이 내가 생각하고 꿈꿔왔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에, 나는 '어떤 모양으로든 사랑이 피어날  있음' 배우게 되었다.



* 할머니의 편지, 휴대전화 메모장에 직접 작성하셨다. (오탈자는 고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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