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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May 27. 2022

기괴한 그림 속 투명히 비친 순수함

<The World of TIM BURTON> 팀 버튼 특별전 @DDP

5월 3일 화요일 오후에 <팀 버튼 특별전> 관람을 위해 DDP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 방문했다. 이미 다녀온 지 한 달이 되어가지만 뒤늦게라도 감상평을 꼭 남겨두고 싶다. 팀 버튼의 작품들을 잘 알진 못하지만 <유령신부> 하나 만으로도 특별전에 큰 기대를 품었다. 그리고 한 달 전쯤 인터파크에서 반값으로 판매 중이던 얼리버드 티켓을 우연히 구매해둔 것도 한몫했다. 유명한 감독의 특별전이 만 원이라면 안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거기다 국내외 최초 공개 작품 150점을 포함 총 520여 점의 스케치와 드로잉, 조각, 영화 및 사진, 설치 작품 등 입체적인 볼거리를 선사했다 하니 여러모로 알찬 구성임이 확실했다.


우선 입장 대기공간에서부터 괴물 그림자가 나오는 20초가량의 짧은 영상이 맞아준다. 다들 괴물 그림자 아래에서 놀란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영상을 찍었다. 난 차마 남에게 찍어달라고 하고 연기를 할 정도로 낯이 두껍지 않아 포기했다. 혼자 전시회를 보러 다니면 내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온전히 작품들을 즐기고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크지만, 이런 점은 조금 아쉽긴 하다.


최근 다녀왔던 전시회는 전부 SNS 업로드를 위한 잘 꾸며진 촬영 스튜디오 느낌이었다. 작품들의 가치를 알아보기도 전에 수십 장의 사진 속 나를 돋보이게 해주는 배경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이번 전시회처럼 아예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있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 심리가 또 야속하게도 남들 다 사진 찍고 있으면 나도 어떻게든 베스트 컷을 건져야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을 갖게 되고 작품 감상은 뒷전이 되어버린다. 물론, 인상 깊게 본 작품을 사진으로 간직할 수 없는 건 아쉽지만 그만큼 더 오래 집중해서 눈에 담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덕분에 팀 버튼의 고뇌 흔적이 온전히 드러난 창작물과 그의 독특한 시선을 알 수 있게 해 준 실감나는 작품들에 몰입할 수 있었다.


팀 버튼은 캘리포니아 예술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우수한 학생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디즈니에 입사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체는 귀엽고 아이들의 동심을 자극하는 디즈니와 맞지 않아서 계속해서 퇴짜를 맞기 십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팀 버튼은 디즈니에 맞춰 바뀌는 대신 꾸준히 자신만의 스타일 영역을 넓혀나갔고, 그의 기괴한 상상력을 펼치기 위해 퇴사 후 워너브라더스에 발탁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팀 버튼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그의 이름을 딴, '버트네스크(Burtonesque)'라는 하나의 양식으로 인정받았다.


잔혹동화 같은 기괴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팀 버튼의 캐릭터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보단 오히려 상처받은 안쓰러운 존재로 보였다. 그 누구보다도 괴물들은 순수한 영혼이라고 믿었던 그의 진심이 그림에 잘 담긴듯했다. 외형은 비록 기괴한 괴물일지어도, 천진난만하고 속이 투명한 순수함을 보여주는 언발란스함이 묘하게 잘 어우러져 교감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캐릭터 스케치를 보고 있으면, 나만의 캐릭터 서사를 그려내며 그들에게 깊이 공감하고 동정하게 된다.


내가 방문한 시간대에 특히 아이들이 많았는데, 부모들은 대부분 "어머 이 그림 좀 봐, 무섭게 생겼지?"라고 아이에게 물었고, 아이들은 "엄마, 왜 얘네들은 눈이 세 개고, 이빨이 다 뾰족뾰족해?"와 같은 의문을 던졌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팀 버튼의 캐릭터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정해둔 '무서움', '잔인함'이 아닌, 그저 일반적인 외형과 다른 모습의 또 다른 캐릭터일 뿐이다. 어쩌면 사실상 '무서움'이란 우리가 어릴 때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심어준 특정 이미지가 아닐까.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쉬웠다는 팀 버튼의 말처럼,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도 스케치로 남겼다고 한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적인 생각들을 스케치북, 호텔 메모지, 식당 냅킨 등 가리지 않고 드로잉을 담아냈다. 그리고 전시회 한 벽 전체를 빼곡히 메울 정도로 방대한 양은 팀 버튼의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완성된 작품이 아닌, 종이 조각에 그려진 러프 스케치 중 수십 개는 완성되지 못했지만 미완성의 미학을 보여주었으며, 가까운 미래에 잘 다듬어져서 남녀노소 열광하는 작품으로 재탄생될 것이다.


"영화 촬영은 물론, 필름 페스티벌, 영화 홍보 투어 등 감독으로서 세계 여행이 일상이었던 그는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영감들을 기록하면서 새로운 관점으로 상상력을 펼쳐왔다. 팀 버튼 특유의 몽환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은 이렇게 탄생할 수 있었다." -팀 버튼 특별전


개인적으로 팀 버튼의 아크릴 페인팅에서 관점의 중요성이 돋보였다고 생각한다. 캔버스 공간 활용이 매우 뛰어났으며, 각각의 모서리에 그려진 여러 캐릭터의 시선에서 그림을 바라보면 마치 그 캐릭터가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마치 내가 큰 괴물의 입장에서 내려다보기도 하고, 작은 존재로 변하여 압도당하기도 했다. 동일한 캔버스에 다수의 시선과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 색달랐으며, 한 작품으로 여러 가지 분위기를 입체적으로 표현해냄에 한참을 감상했다.


"팀 버튼은 현실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지 않는다. 원근법을 깨고 인물에 대해 스스로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새롭게 해석하여 표현한다. 유명인들과 가족들 등 다양한 사람들의 캐리커처는 팀 버튼의 과감한 상상력에서 전개되는 내면의 감성들이 표출된 결과물이다. 인간과 동물, 신화 속 캐릭터가 모두 섞여 창조된 이미지들은 그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강조한다. 드로잉과 페인팅, 조각들은 팀 버튼의 주요 프로젝트와 별개로 개인적인 작품 활동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팀 버튼 특별전


전시회장 밖 천장에 전시된 <벌룬 보이>


팀 버튼의 작품들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특별전을 둘러보면서 낯익은 캐릭터들이 나를 반겼다. 정확히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학창 시절에 친구들 학용품에 잔뜩 그려져 있어 알게 모르게 접했던 것 같다. 하지만 <벌룬 보이>는 초면이었다. 몇 없는 귀여운 느낌의 캐릭터 중 하나였던, 큰 눈에 비해 작은 동공과 부풀어져 있는 모습이 왠지 공허해 보였다. 그리고 읽어본 캐릭터 설명글에서 이 기분을 납득할 수 있었다.



"벌룬 보이 - 풍선은 늘 무언가를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공허하게 늘어져있다가 한편으로 가득 차 떠다니는 것을 보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아름다우면서 비극적이며 슬프다가도, 활기차고 행복한 무언가가 동시에 존재했다."


전시회의 마지막 작품은 팀 버튼의 작업실을 그대로 꾸며둔 공간이었다. 책상에 가득한 서류들과 각종 필기구, 책상 양 옆에 세워진 큼지막한 아이디어 보드들에 꽂혀있는 스케치들, 제삼자가 보기엔 어질러진 공간에 불과했지만,  그의 시스템에 잘 맞춰 정리된 거겠지. 그렇게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고 그걸 잘 정리하고 표현할 줄 알기에, 그는 "희극과 비극이 서로 뒤엉켜있는 불행한 캐릭터들의 복잡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잘 묘사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나처럼 작품 하나하나 천천히 둘러보고 오디오 가이드를 모두 듣고, 영상들도 모두 시청한다면 2시간은 족히 걸리는 볼거리 넘치는 특별전이었다. 평균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하니 시간 넉넉하게 잡고 방문하면 잠깐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버트네스크 세계관에서 힐링받을 수 있다.


전시된 작품들 퀄리티는 말할 것도 없이 매우 만족스러웠고 운영방식에도 큰 불편함이 없었다. 스태프들도 충분히 여러 구간에 적절히 배치되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소거도 하지 않고 뻔뻔하게 사진 찍는 비매너 관객들이 간혹 있었고, 이를 저지하는 스태프들이 주변에 없었던 건 아쉬웠다. 그런 비매너 관객들은 부디 앞으로는 더욱 성숙한 관람 매너를 갖췄으면 좋겠다.


DDP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서 9월 12일까지 특별전이 진행되니 꼭 한 번쯤은 관람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방문 전, 아래 공식 웹사이트 링크에서 깔끔하게 정리된 특별전의 섹션별 하이라이트 부분들을 미리 보고 가면 더 깊이 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https://ddp.or.kr/index.html?menuno=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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