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년 17세. 머스마로 태어나 사내로 각성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사춘기. 참으로 답답하고 주먹이 오르락내리락 하던 시기를 무자비한 잔소리와 협박으로 대신하며 나름 무사히 보냈다. 이제는 나보다 키가 크니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는건 불가능 해졌지만 대신 두배 가까운 몸무게를 이용하여 깔고 앉는건 아직 유용하게 써먹을수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싶다.
툭하면 소리 지르고 욕은 아예 입에 달고 살면서 하나뿐인 동생을 쥐 잡듯 잡아대던 녀석이 지난 해 초 무렵 동생에게 바통을 넘겨주더니 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살고 있다. 거참, 지 혼자 끝낼 일이지 그게 뭐 좋은 일이라고 동생에게까지 바통을 넘겨주나 그래. 게다가 준다고 넙죽 받는 놈은 또 모꼬.
그런 녀석의 코 밑이 올 초부터 제법 거뭇거뭇해졌다.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면도하는 방법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드디어 날을 잡았다. 다음 달부터 바빠질 예정이라 조금은 이른 듯싶었지만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요즘은 일회용 면도기도 품질이 좋아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다. 두 달 전에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묵었던 호텔에서 매일같이 면도기랑 비누를 새 것으로 교체해준 덕분에 사용하지 않은 면도기는 알뜰하게 챙겨왔다. 나름 이쁘게 포장되어 있는지라 내가 아들을 위해 사온 것처럼 재포장해서 녀석의 손에 쥐어 주었다. 어차피 지금은 솜털에 불과한지라 일 년 이상은 거뜬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욕실로 아드님을 모셔와 일단 깨끗하게 세수를 시켰다. 면도 크림이 있으면 좋겠지만 비누로 대체. 소중한 첫 면도기를 아드님의 손에서 뺏어와 친절하게 면도하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 면도하기 전에 세수를 하지 않으면 피부에 남아있는 이물질 때문에 피부 트러블이 생길 수 있어. 면도기는 예리한 칼이기 때문에 수염만 깎는 게 아니라 피부도 깎아 버리거든. 아주 조금이기는 하지만 피부에 남아있는 이물질이 그 상처에 들어가서 피부에 트러블을 일으키는 거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걸 몰라서 면도 후에 가렵다고들 하지. 그러니까 세수하고 면도하는 습관을 들여. 면도한 다음에는 꼭 알콜 성분이 들어있는 스킨으로 마무리 하고. 면도할 때 어디서부터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보통은 귀 부근에서 시작해.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부드럽게 두어 번 정도 쓸어주듯이 내려주면 되는거야. 턱과 코 밑은 털이 뻣뻣하기 때문에 아래에서 위로 올리듯 하는데 지금은 그냥해도 되지만 나중에 니 수염이 굵어지면 피부를 손으로 당기든지 아니면 턱을 들어 올려 피부를 팽팽하게 해준 상태에서 면도해야 해. 그래야 깨끗하게 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칼날을 수직으로 하지 않으면 베일 수 있으니까 조심하고. 오늘은 내가 해주지만 다음부턴 니 혼자 해. 한두 번 정도는 옆에서 봐줄게.
주저리주저리 설명해주면서 면도를 해주었다. 보통은 두어 번 정도 깎고 나서 물에 헹구면 되는데 녀석의 그것은 워낙에 솜털이다 보니 면도날 사이에 뭉쳐지는 바람에 한 번 깎고 한 번 헹구어 주기를 반복해야 했다. 에구, 귀찮게시리.
아빠들의 로망 중 하나가 아들 면도 시켜주는 거라는데 나는 오늘 그 로망을 성취했다. 그런데 기분 참 묘하다. 뭔가 뿌듯하면서도 마음 한 귀퉁이가 비워진 느낌이다. 아기 때의 귀여움이 사라진 자리에 장성한 아들의 든든함이 들어섰다고나 할까.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바스러질 것 같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이렇게 커버렸다니. 키는 벌써 나를 1.5cm나 추월해 버렸다. 이렇게 커버린 녀석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명치를 한 대 씨게 때려주고픈 마음이 든다. 그냥 아기로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안 좋을라나?
암튼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아기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마음 한 구석이 휑한 이유다. 대신 징그럽지만 든든한 아들이 생겼다. 물론 아직은 전혀 든든하지는 않다. 몸뚱이만 커졌지 속은 여전히 아이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언제 든든한 아들이 되어 줄라나.
아, 나는 첫 경험 때 이런 거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니는 정말 복인 줄 알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