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가 흐르면 흐르게 둘 뿐 집착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집착한다고 사랑이 변하지 않거나 사라지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변화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무상의 세계에서 사람이든 사물이든 무언가에 고착되어 변화를 거스르려 해 보았자 고통스러울 뿐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나'조차 인연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데, 다른 사람의 마음이랴.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헤아리려 애쓰게 된다. 일부러 의도하지 않아도 의식은 매혹당한 상대를 환상으로 직조한다. 정신없이 재미있는 소설에 빠져드는 것처럼 초집중하여 상대를 읽고 또 읽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은 에로스에 물든 안경으로 상대를 읽기에 상대라는 텍스트는 주로 오독되기 쉽다. 자신은 상대를 충분히 제대로 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이다. 멋대로 읽은 텍스트는 시간이 지나면 오류가 밝혀진다. 상대는 나의 생각 속 그 사람이 아니다. 나 또한 그의 생각 속 이미지와 다르다. 이미지와 실상의 간극은 실망으로 이어진다. 시간은 관계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상대는 변화한다. 나도 그렇다. 에로스는 우정으로 승화되지 않는다면 쉽게 상처를 내고 관계를 허문다.
무상의 시공을 사는 우리는 사랑이 찾아올 때 그 감정에 달라붙지 않도록 벌렁거리는 심장을 다스려야 한다. "심장아~ 진정하렴. 머리야. 정신차리렴. 이 또한 지나간단다." 향긋한 차 한잔을 음미하듯 사랑을 음미하고 때가 되어 떠나갈 땐 미소지으며 보내주기. 그리고 나서 사랑이 지나간 자리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들을 환영하면, 에로스의 경험은 새로운 순간을 창조하는 거름이 되어준다. 새로운 에로스의 바람이 불 때 경험은 지혜가 되어주고, 언제든 추억을 떠올리면 편안히 미소 짓으며 사랑의 상태로 존재를 확장시킬 수 있다.
바람이 풀밭을 훑고 지나 가듯 사랑의 오고 감을 내버려 둘 것. 어느 순간에도 머물지 않는 삶은 지금을 창조하는데 즐거울 뿐 과거로 역행하지도 미래로 내달리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