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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추구자 Mar 18. 2022

자발적 고아가 되기로 했다 1

배려가 상처로 돌아오는 것은 이제 그만

아이를 낳고 어린 나를 보았다. 여태껏 알지 못했던 순수한 내 감정들의 민낯을 보게 된 것이다. 가족을 향한 목적 없는 사랑과 신뢰. 또 그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 낯선 세상을 향한 두려움과 호기심. 이런 감정들이 내 안에 내재되어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왔던 것 같다. 아이들을 통해 받는 사랑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엄마란 존재가 무엇이기에 자녀들은 그토록 엄마를 바라고 원하는 것인가.


내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받아쓰기를 백점 맞아 행복에 들떠있을 때에도, 반장이 되어 임명장을 받았을 때에도, 그저 학교가 끝나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나는 오직 기뻐해 줄 엄마를 떠올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시집살이에 상처 입고 먹고사는 것에 바빴던 우리 엄마는 나의 예상과 늘 달랐다. 늘 바빴고 지쳐있었고 나와는 멀리 있었다. 바쁜 일상에 짬이라도 나면 엄마는 친구들 혹은 취미생활로 시간을 보냈다.

결혼을 하며 남편과 가장 많이 공감했던 것은 외로운 유년시절이었다. 부모님들의 애정 어린 돌봄을 받지 못했던 우리는 꼭 아이를 낳게 된다면 엄마인 내가 전업주부가 되어 잘 돌봐주자고 다짐했다. 엄마의 품이 너무나도 그리웠지만 손만 잡아도 뜨겁다며 손을 뿌리치던 엄마에게 받았던 상처를 생각하면 당연하다 못해 너무나도 간절한 소망이었다. 임신소식과 함께 퇴사를 하고 아이에게 집중하도록 했다. 태어난 아기는 너무나 소중했다. 나와 남편을 똑 닮아 소심하기도 했고 흥이 넘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늘 나를 웃게 해주려고 하고 있었다. 그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도대체 왜 우리 부모님은 표현해주지 못했을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는 오빠가 늘 안쓰러웠다. 어려서부터 말도 잘하고 따지기도 잘하는 나는 자연스레 오빠 뒷전이었다. 오빠가 어렸을 때 시집살이를 하던 엄마는 집안일과 농사일에 바빴는데 할머니는 버릇나빠진다며 젖도 제대로 주지 못하도록 엄마를 나무래 오빠가 배고파 울다 탈장까지 된 사건을 겪었다고 했다. 또 시집살이를 끝내고 할아버지가 땅을 사놓으셨던 경기도로 이사를 하면서 오빠가 1년 동안 유치원을 다니지 못하다가 입학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받아쓰기 성적이 좋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100점짜리 받아쓰기 시험지를 들고 신나서 달려갔던 나에게는 당연한 듯 싸늘하게 반응하던 엄마가 오빠가 80점만 맞아도 얼마나 기뻐했던지 생생하다. 그렇게 오빠는 늘 안쓰러운 존재였고, 어린 시절 나는 늘 혼자였다.

더 마음 아픈 일은 그런 것이 나에게는 당연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 집에서 나는 잘 삐지고 잘 울고 못난 감정이 툭 튀어나오는 성질 사나운 아이 었다. 아니 지금까지 나는 그들에게 그런 사람이다. 나 또한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달라졌다. 결혼 초반에는 친정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남편의 직장으로 떨어지게 되면서 얘기는 달라졌다. 나의 소중한 아이들을 온전히 나 혼자 대하게 되면서 나의 사랑이 가득한 마음들은 나의 태도가 되었고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나와 남편을 닮은 내 아이의 성향을 잘 알고 있기에 그 아이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었고 잘못된 행동들은 사랑으로 잘 가르쳐 주었다. 나의 못난 면도 닮았기에 아이가 극복할 수 있도록 응원하는 마음도 커져갔다. 노래도 부르고 율동도 해보고 그림도 그렸다가 역할 놀이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행복이 가득 찬 삶이었지만 엄마와 통화 한 날은 마음에 나쁜 감정들이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내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엄마는 아빠, 오빠, 올케언니 등 주변인들에게 속상했던 일들을 나에게 토로했고 엄마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나는 그 사실들이 너무나 괴로웠다. 엄마를 달래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내 안에서 나를 또 괴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그 감정들로 인해 하루를, 일주일을 괴로워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왜 먼저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를 가지고 상처를 떠안을까. 그 답을 최근에서야 찾았다. 그렇게 먼저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상처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아빠가 공격적인 할머니 밑에서 사랑을 배우지 못해 무뚝뚝한 거겠지, 오빠가 맏이라서 책임감에 지쳤겠지, 엄마가 어렸을 때 가난했기 때문에 물욕이 많은 거겠지. 스스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그렇게라도 이유를 찾지 않으면 그들에게 받는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노력도 헛수고였다는 것을 40살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남편이 이름 있는 직장을 번아웃으로 그만두고 신도시에 아파트를 샀을 때, 아직도 그때의 엄마, 아빠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한 해전에 오빠가 작은 시골집을 사서 인테리어를 예쁘게 했다며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왜 이리 작은 집을 샀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너무 예쁘다고 축하한다고 다녀왔던 기억이 있다. 엄마, 아빠는 주차장 입구를 잘 못 찾아 입주민 전용 입구에서 헤맸다고, 들고 온 음식과 쌀이 무겁다며 짜증 섞인 얼굴로 들어왔다. 밥을 먹으면서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훌쩍이며 "엄마, 축하한다고 해줘"라고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나의 울부짖음이었다. 엄마는 못 들은 척 그냥 식사할 뿐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엄마와 아빠의 행동은 더 가관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아빠가 베트남 참전용사라 국가유공자 가격으로 임대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아직도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던 엄마와 아빠가 선하다. 축하해달라고 울먹이며 말하던 나에게 끝내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안 하고 헤어졌다. 며칠 뒤 엄마는 전화로 오빠 차를 사준다고 했다. 아마도 우리 집에 온 그날 마음속으로 작은 집으로 이사 간 오빠 생각에 마음이 아팠나 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도대체 나의 부모는 누구일까. 나도 엄마처럼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지만 아들은 아들대로 딸은 딸대로 너무나 사랑스러운데 왜 두 분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이 안될까?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시는 그들에게 상처받지 않기로. 나에겐 나를 축하해줄 부모가 없다.

이기적인 것이 잘못인 줄만 알았지만 이젠 나를 보호해줄 의무가 나에게 있기 때문에 나를 보호하기로 했다. 당분간 자발적 고아로 지내기로 했다.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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