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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추구자 Oct 25. 2023

자발적 고아가 되기로 했다 2

진정한 홀로서기를 시작하다

엄마가 되고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을 많이 들어봤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부모가 되고 보니 나는 나의 부모를 더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첫 글을 쓰고 1년 반이 지났다.

바로 글을 이어서 쓰려고 마음 먹었었지만 폭풍처럼 쏟아지는 감정에 차분히 글을 써내려갈 수 없었다.


1년이 넘든 시간 동안.

스마트폰에 찍힌 이젠 나에겐 상처가 된 부모님들의 전화번호가 찍히는 날에는 꾹꾹 눌러왔던 상처가 다시 수면위로 올라와 나를 깊은 아픔에 잠기게 하곤 했다.

나의 상처받은 마음에 대해 그리도 표현했건만 돌아오는 건 결국 나만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 뿐이었다.


주로 아빠에게 전화가 왔는데 아빠는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하는 것이 하루 일과 중 하나인 분이다.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고 가르치고 참견하고 자랑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다. 자랑이라면 남의 자랑까지도 무의미하게 열심히 해대고,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상관없이 실례인지도 모르고 참견하고 가르치는 걸 평생해오신 분이다.

일례로 어린 시절 아빠 지인 중에 당뇨병으로 고생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에게 병원에 가서 인슐린 주사 맞고 치료하면 된다고 한참을 설명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에게 필요한 건 조언이 아니라 병원비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던 적 있었다. 아픔을 공감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불쌍한 상대라고 생각하며 조언하는 것은 아닌지 그 모습이 참 이상하고 무례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런 무례함은 나의 삶에도 적용되어 끊임없이 선을 넘어와 나를 힘들게 했다.

그 동안은 막연히 걱정어린 잔소리인 줄 알고 넘어 갔었지만 애정어린 잔소리와는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아이를 키우며 알게 되었다. 자식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해가 되지는 않을까하는 고민은 1도 없었다. 나의 감정과 특성은 알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듯 보였다. 상대방과 상관 없는 일방적인 조언이라니. 내게는 폭력이 되어 돌아왔다.

내가 자발적으로 고아처럼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연락을 안하고 싶다고 얘기한 후 친정 부모님은 시댁에 끊임 없이 연락해 하소연을 해댔다. 처음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회복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를 아는 타인에게 밝히는 모습을 보면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았다. 그들로 인해 나의 고아가 되기로 한 결심이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이니까. 그들의 행동이 하소연이나 걱정의 옷을 입고는 있지만 결국은 나에 대한 험담이 되리라는 것을 왜 모르는 것일까. 나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다른 이들에게 나와의 상황을 전하며 자신의 마음을 푸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들을 어찌 품을 수 있을까. 자식보다 자신이 중요한 부모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매번 당할 때마다 아픔은 새롭고 더 지독했다.

결국 시댁에는 나의 치부와도 같은 상처를 밝힐 수 밖에 없었다. 친딸이 맞냐는 반응을 듣는 것은 명예를 중요시하는 성향의 나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엄마가 되던 날, 친정 가까이에 살던 나와 남편은 친정식구들과 외식을 하고 진통을 느껴 병원으로 갔다. 출산 후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을 거라 막연히 기대했던 나는 친정에서 5분거리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출산을 했다. 저녁에도 일이 있으면 외출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엄마는 밤에 아이를 낳았다는 연락에도 오지 않고 주무셨고 다음 날 친정 식구들이 모여 한번에 아이를 보러왔다. 정말 나의 다른 지인들(= 남들)처럼 그렇게 나를 보러 딱 한 번 왔었다. 출산 당시에는 남편이 옆에서 잘 돌봐주고 정신 없이 시간이 흘러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내가 딸을 낳고 보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딸이 처음으로 아이를 낳았는데 남들처럼 단 한번 병원을 방문할 수 있을까. 결국 산후조리를 하러 친정에 가서 지내긴 했지만, 이미 1년전 친손주 산후조리를 하며 너무 힘들었다고 늘상 하소연하던 엄마에게 아이를 맡길 수는 없었다. 자신의 스케줄이 많았던 엄마는 계속 외출했고 나는 그렇게 홀로 엄마가 되는 법을 찾아갔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엄마와 통화하던 중 그 날 본 뉴스에서 상속법이 바뀌어 이제는 아들과 딸이 같은 비율로 상속을 받게 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아빠가 모든 재산을 오빠에게 넘긴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많지 않은 유산을 받으려는 마음도 없었거니와 너무 나중 이야기라서 내가 받을 몫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서 전했던 말이었는데 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재산을 노리는 남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나보다. 

출가외인.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면 나에게 받을 효도조차 꿈꾸지 말았어야 할텐데, 그런 태도와는 다르게 오빠가 나중에 엄마가 혼자가 되면 나랑 같이 지내라고 했다며 넌지시 자신들의 계획을 전하는 엄마를 어떻게 이해해야 했던 걸까. 

나를 품어주는 엄마는 항상 없었는데 엄마는 그런 나의 품이 필요했던 것일까...


엄마의 품이 그리웠던 때마다 나는 늘 기도했다.

"신이시여, 고아같은 저를 돌보아주세요."


그렇게 나는 홀로 서게 되었다.




많은 분에게 읽혀지 글은 아니었지만 다음 글로 이어진다는 약속을 해놓고도 계속되는 아픔으로 인해 글 올리는 것이 망설여졌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독자분의 다음 글이 기다려진다는 댓글로 인해 용기내어 글을 올립니다. 그분에게 관심을 가져 주셔서 그리고 용기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합니다.

저의 하소연과 같은 글이지만 누군가에게 위로가, 또는 누군가에게는 저의 삶을 엿보는 재미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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