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프맨작가 Nov 09. 2024

<그리스인 조르바> <파이 이야기> 종교에 대하여

종교는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상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 작가는 붓다의 이야기를 독서하는 사람이다. 그는 심지어 붓다의 목소리를 듣고 글을 받아 적는 사람이다. 




"붓다는 내 안에서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나는 붓다의 상징으로 뒤덮인 푸른 띠처럼 나의 뇌에서 풀려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중략) 자비와 체념과 공(공)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내 앞에 나타났다. (중략) 영혼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정신이 되었으며, 정신은 무(무)가 되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저자)가 존경하게 되는 '조르바'의 탄생 이야기가 성모마리아와 관련 있다. 


<아 그러셔? 두고 봐라, 네 새끼를 귀머거리로 만들어 신성을 모독한 버릇을 고쳐 주고 말 테니!?>


그렇게 조르바의 아버지가 성모님께 욕을 한 것을 조르바가 피해를 입고 청력이 안 좋다고 고백한다. 



"암요. 필요한 건 하느님이 다 가지고 계시겠지요... 하느님이 가지고 계시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 늙은 자린고비가 글쎄, 우리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고요!"



조르바는 자유로운 영혼의 사람이다. 그는 종교마저도 비꼬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는 그리스 신들을 이야기하다가 또 가톨릭의 종교를 넘나드는 경험을 쏟아낸다. 모든 신들을 그에게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다. 



 








조르바는 스프링이 달린 고무 구두를 신고 있는 것처럼 하늘을 날 것처럼 혼자서 춤을 추었다. 그는 그 자신이 종교였다. "나는 오로지 나만 믿소." 이렇게 고백하는 조르바! 그가 미친 듯이 추는 춤이 새처럼 중력을 허무는 것을 또 다른 주인공 젊은 두목은 목격한다. 그를 멈추려 했지만 오히려 조르바, 그의 춤을 배우고 만다. 결론은 주인공, 니코스 카잔차키스 작가가 조르바의 종교에 빠지게 된 것이다. 조르바의 종교는 '사람을 위한 것, 자유로운 인간 정신'을 위한 것이었다. 어떠한 종교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믿는 대로 자신의 삶이 가는 대로 믿게 되는 종교이다. 어쩌면 그러한 종교가 더욱 인간을 더욱 인간적으로 강인한 영혼으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게 하는 힘의 원천일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리스 본토도 아니고 크레타 섬이라는 중첩지역을 배경으로 온갖 문명들과 종교가 섞여있게 된 곳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리스 신화, 카톨릭교, 터키인들의 침략이 있었기에 이슬람교의 흔적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한데 융합하여 사람이 사람다운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위대한 인간 정신이다.  휴머니즘, 인간 정신이 바로 선 그곳에 신을 제대로 사랑하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생존 이야기 <파이 이야기>의 일부를 발췌하였다. 



“종교는 미스터리예요.”


“흠. 그런 뜻이 아니고. 잘 들어라, 얘야. 종교를 가지겠다면, 힌두교도가 되든지, 기독교도가 되든지, 이슬람교도가 되든지, 하나가 되어야 해. 산책길에서 그분들의 말씀을 들었잖니.”


“왜 셋을 한꺼번에 하면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마마지는 여권을 두 개나 갖고 있어요. 인도인이고 또 프랑스인이거든요. 어째서 힌두교도 겸 기독교도 겸 이슬람교도가 될 수 없다는 거죠?”


“그건 달라. 프랑스와 인도는 지구상의 국가잖니.”


“하늘에는 나라가 몇 개나 있는데요?”


어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나. 그게 요점이야. 한 나라니까 여권도 하나.”


“하늘에 나라가 하나만 있어요?”


“ - <파이 이야기>, 얀 마텔 / 공경희 




간디께서는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에요.” 파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소년의 때묻지 않는 스펀지 같은 심정으로 종교를 신을 경계 없이 사랑하였다. 이슬람교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같은 존재라고 하는데, 왜 서로 싸우는지 소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의 모든 신들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에 어른들의 편견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각 종교의 선지자들과 어른들이 모여서 파이 소년의 이러한 치우치지 않는 무색무취의 종교관에 결국 손을 들게 되고 만다.




7개월 동안 바다에서 벵골 호랑이와 치열하게 생존한 스토리를 그린 <파이 이야기>의 생존 비결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신들에게 날마다 기도를 올렸던 그 인간 정신이었다. 그 인간 정신은 삶을 너무 사랑하기에 포기할 수 없었던 고귀한 것이었고, 신에 대한 사랑이었다. 신은 무한한 존재이지만 유한한 존재의 사람에게 삶이란 축복을 주셨고 우리는 이 삶을 신들보다 훨씬 멋지게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하는 깨달음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휴머니즘, 인간 정신이었다. 죽음이 있음을 알기에 신을 사랑하고 인간과 삶을 너무도 사랑하는 것, 휴머니즘을 갖고 뜨겁게 살고 싶어진다. 




어떠한 종교도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위한 것이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신만을 위한 종교는 더 이상 오늘날 사람들의 세상에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키르케고르 절망의 철학자 vs 보통 사람들의 희망 철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