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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추 May 09. 2020

다시 우연히 찾아올 편도권 표를 기다리며

 어제와는 다른 새파랗고 찬 공기가 내 코끝을 건드렸다. 눈이 채 뜨이기도 전에 들려오는 빗소리. 퉁퉁 부은 눈을 간신히 뜬 후, 커튼을 걷어보니 역시나 비가 내린다. 스위스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었기에, 그 어느 날보다도 반짝이는 햇빛을 원했지만 과욕이었나 보다. 천연 곱슬머리를 지닌 나에게 ‘비’라는 존재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다. 그 아무리 강력한 스프레이일지라도 내 곱슬머리를 꺾지는 못한다. 비 내리는 스위스는 이것대로 그만의 운치가 있으리라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섭섭한 마음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평소보다 오랜 시간 동안 머리를 정돈시킨 후, 본래 계획했었던 체르마트로 향했다. 숙소에서 환승 2번, 왕복 5시간 거리인 체르마트를 가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마테호른’이다. 파라마운트 영화사 로고에 등장하는 산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사실을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아무렴 상관없다. 영롱하게 솟아오른 산봉우리인 마테호른은 이미 내 무의식 속에 설렘과 환상을 자극하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 두근거림을 간직한 채, 체르마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소리를 자장가 삼아 새우잠 자다 보니, 금새 체르마트역에 도착했다. 역시나 여전히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 낀 상태였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지상에서도 마테호른이 선명하게 보인다고 하는데, 도무지 보일 기미가 안 보였다. 조금씩 먹구름을 닮은 잿빛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이왕 여기까지 와버렸으니 산봉우리 손톱만큼이라도 보고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마테호른을 조금이라도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수네가 전망대 매표소로 향했다.


 전망대로 향하기 위해서는 케이블카를 필수로 타야만 했다. 보아하니 전망대까지만 향하는 편도권과 전망대에서 다시 이곳으로 내려오는 왕복권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시스템이다. 편도권을 끊으면 산을 걸어 내려와야 한다는 말이다. 스위스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가슴 속 무언가를 ‘툭’ 하고 건드렸다. 역시 머리보다는 가슴을 따르는 것이 옳다. 3분이라는 짧은 고민 끝에 왕복권을 끊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서둘러 편도권을 끊었다. 매표소 직원이 편도권 구입하는 것이 확실하냐며 3번이나 되묻는 바람에 잠시 흔들렸으나, 결국엔 내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전망대로 향하는 케이블카에 탑승했다. 비 때문인지 그 길다란 케이블카에 탑승한 사람은 나 포함 총 5명뿐이었다. 케이블카는 어둡고 컴컴한 통로를 지나 빠른 속도로 우리를 전망대에 올려 보냈다. 이정도 높이라면 충분히 걸어 내려갈 수 있을 거리일 것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전망대에서 내리자, 가슴 벅찬 풍경이 나를 압도시켰다. 무엇 하나 튀는 것 없이, 각각의 산봉우리들이 사이 좋게 자리잡고 있었고 이를 따라 뭉게구름이 두둥실 피어 올랐다. 빽빽히 밀집된 고층빌딩에 익숙해진 나에게 이 풍경은 그 어떤 장애물도 없는 해방감을 선사해주었다. 헌데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 그래서 마테호른은..? ”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눈으로 덮인 하얀 바위산을 찾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제자리에서 몇 번이고 돌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뿌연 구름 안개들 사이에서는 그 산이 그 산 같았다. 마테호른 전망대에서 마테호른이 보이지 않다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답게 보이던 구름안개들을 진공청소기로 흡입해버리고만 싶었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혹시나 안개가 걷힐 수도 있으니 호숫가 근처 벤치에 앉아 마테호른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를 잠시 기다려보기로 했다.


 10분..20분..30분.. 1시간이 흘렀다.


 야속하게도 마테호른은 그 고귀한 얼굴을 끝끝내 드러내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아무 산이나 붙잡고 마테호른이라 믿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먹구름은 점차 더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편도권을 끊던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직원의 표정이 이해 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날씨가 더욱 악화될 것 같다는 조바심에 서두르기 시작했다. 우선 무작정 경사가 아래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30분쯤 아무런 생각 없이 걸었을까. 무언가가 이상하다. 이 길로 걸어 내려가는 사람이 왜 나 혼자 뿐이지? 길이 점차 좁아지더니 간신히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간격에 다다랐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곧바로 낭떠러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안개 구름은 더욱 더 몰려와 시야를 가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 만약에 내가 이 상황에서 갑자기 큰 재채기를 하게 되어 중심을 잃어버리면 어쩌지? 말벌이 날아와 날 낭떠러지로 밀어버리면 어쩌지? 별의별 잡생각이 날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최악의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나를 덮쳤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길 중턱에 위치한 둔탁한 돌에 주저앉아 안개가 조금이라도 걷히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관광안내소에서 무심결에 챙겼던 지도를 펼쳐보았지만, 현재 내 위치를 알 턱이 없었기에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안개 속 산 중턱에 갇혀있는 경험은 처음이라, 어이없는 웃음이 자꾸만 피식 피식 새어 나왔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당황스러운 감정도 잠시뿐, 어느새 나는 이 공간에 온전히 스며들었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구름안개가 내 몸을 서서히 휘감았다. 내가 이토록 세상과 단절되어 홀로 존재했던 경험이 있었던가 되짚어보았다. 흐릿해진 시야가 기분을 몽롱하게, 또 생생하게 만들어준다. 나 자신에 더욱 집중을 해본다. 현재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선이 그 어느 때보다 직접적이며 확연하게 다가왔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감정은 ‘설레는 불안감’이었다. 이 역설적인 감정은 곧 ‘취준생’이라는 옷을 의무적으로 입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사실 나에게 ‘꿈’이란 상당히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존재다. 중학생 시절부터 꿈의 존재는 끊임없는 자극제가 되어주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온 신경을 쏟을 때, 생생하게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헌데 ‘취준생’이라는 단어는 ‘꿈’과 유의어처럼 보이면서도 반의어로 받아들여진다. 과연 나는 사회의 정해진 틀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묵묵히 내 갈 길을 걸어나가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자신을 향한 되물음들이 모여 ‘설레는 불안감’을 생성했던 것 같다. 나의 내면에 집중을 하는 사이, 공고히 자리잡고 있던 안개덩어리들이 조금씩 흩어져 시야가 넓혀지기 시작했다.


 나는 희미하게 보이는 길을 따라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구름안개가 사방을 에워쌌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30분쯤 걸었을까. 희미하게 표지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갖고 있던 지도가 쓰일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표지판과 지도를 비교해보며 아마 불행하게도 최고난이도 사이클 코스로 내려오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표지판을 발견한 이후부터는 다행히도 헤매는 일이 없어 무사히 체르마트 마을로 내려왔다. 평지가 있는 마을이 이토록 반갑고 소중할 수가 없었다.


 뻐근해진 몸을 이끌고 숙소로 되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편도권 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왕복권 표를 끊었더라면 온전히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까? 산 속에 갇히는 경험을 또다시 겪고 싶지는 않지만, 겪어보니 이것 나름의 매력이 있다. 편도권 표는 여행 뒤 새로운 옷을 입게 되는 나에게 우연히 주어진 선물일 지도 모른다. 다시 우연히 찾아올 편도권 표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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