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여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나의 길은 파리로 통한다.
여행은 언제나 옳지만, 이제는 여행의 흥분보다 드골 공항에 도착해 집으로 향할 때의 마음이 더욱 편하고 좋다.
아마 한국에 사는 사람이 인천 공항에서 집으로 향하는 마음과 같으리라 생각한다.
무채색의 6층을 넘지 않는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오렌지빛의 조명이 하나둘 켜질 때 즈음 집에 도착한다.
파리로 돌아온 다음 날은 어김없이 외출한다.
동네 터줏대감이라도 된 듯, 내가 파리를 비웠던 짧은 시간 동안 주변 가게는 바뀐 곳이 없는지, 동네 삼거리의 카페는 여전한지 둘러보며 짧은 산책을 하면 마음이 더 편해지기 때문이다.
은퇴한 듯 보이는 무슈(Monsieur - 프랑스어로 남성을 지칭하는 말)는 항상 읽을거리를 가져와 같은 자리에서 커피를 즐긴다.
마치 철학자 칸트의 외출 시간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시계를 맞췄다는 이야기처럼, 그를 통해 일상의 큰 변화가 없음을 느끼고 안정감을 찾는다.
변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명제 보다 변하지 않아 신뢰가 간다는 쪽이 파리의 매력일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는 파리는 세상에서 가장 젊은 도시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 방문했던 도시의 모습을 나이가 지긋해 다시 와도 그 상점과 거리를 그대로 만날 수 있는, 나의 젊음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도시라는 뜻이다.
도시를 만들 때부터 카페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던 것처럼 카페의 테라스는 거리 풍경이 되어 준다. 오늘도 카페테라스에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담배 연기가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온다.
혼자 책을 읽는 사람, 수다가 한참인 친구들, 별일 없이 잘 지내냐고 묻는 주인과 손님.
장 콕토(Jean Cocteau)의 말처럼 파리에서는 모두가 배우가 되기를 원하지, 관중이 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파리에서 지금까지 내가 발견한 것은 에르메스의 가방도 브리스톨 호텔의 레스토랑도 아니다.
책을 읽고 산책할 시간과 카페테라스에 앉아 지나가는 수많은 것을 관찰할 기회를 주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그리고 길에서 구걸하는 이들에게 오늘은 어떠냐며 안부를 건네고, 그중 누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그가 앉던 곳에 누군가 꽃을 두고 가는 인간애를 느끼게 해줬다.
오늘도 나는 파리에 익숙해지려 한다. 하지만 당연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시간을 가둔 도시, 멈춰버린 도시가 아니라 그 숱한 시간 속에 쌓인 먼지를 불어내어 값어치를 찾는 기쁨을 느끼려 한다.
오늘도 나는 파리를 걸었고,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지난 10여 년간 파리를 여행하듯 다녔지만, 내일은 또 다른 파리가 나를 품어줄 테니, 내일도 나는 또 길을 나서고 싶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파리를 찾는다면 꼭 느리게 걷고 또 걷고, 이 도시를 무대 삼은 생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을 느껴보면 좋겠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바람.
서울 살던 시절, 집 앞에 '커피집 시연'이 생겼다. 헌책으로 커피를 마신다는 점이 재밌었고, 한국에 드문드문 갈 때마다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작년에는 행사가 있다는 양해에 커피를 마시지 못했지만, 다음을 기대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부디 오래오래 그 자리를 지켜줬으면 좋겠다.
(망원동의 '훈고링고'와 제주의 '소로소로'도, 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