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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그라피 Jun 22. 2020

여름휴가

언젠가는 꼭 가야지


많은 사람이 별처럼 반짝였다.  


Manche


8월의 파리는 전쟁통에 사람들이 피난이라도 간 것처럼 조용하다.

나라에서 유일하게 여름휴가 시기를 제한받는 곳은 불랑제리(boulangerie, 빵집) 정도다.

빵집은 순번제로 쉬고(한꺼번에 모두 닫으면 도시에 남은 이들이 곤란하기 때문) 일반 상점은 6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짧으면 2주, 길면 한 달 동안 문을 닫고 어디론가 떠난다.


나는 누군가의 휴일을 위해 일을 하므로 프랑스에 살며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가이드의 8월은 분주하지만, 파리지앵들의 출퇴근 시간에는 사람이 적고 동네가 조용해져 의외로 한적한 분위기를 즐기기에는 좋다. 물론 이를 모르고 오는 여행객들은 당황하기 일쑤. 유명한 레스토랑도 대부분 휴가를 떠난다.


나 역시 이들의 여름 바캉스에 아직 익숙해지지 못한 건지, 작년 여름에는 운전면허 갱신 해프닝이 있었다.

8월 만료였던 면허증을 갱신해야겠다고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여름 성수기를 지나고 문득 날짜를 확인해보니 만료까지 1주일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상황. 프랑스에서, 그것도 바캉스 기간 내, 1주일 만에 공공 서비스를 처리한다는 건 거의 기적 같은 일이다. (세상 공공 서비스는 한국이 최고다. 이건 정말 확신한다. 감사합니다. 공무원 여러분!)

아니나 다를까, 면허를 갱신하기 위해서 제출해야 하는 필수 의료 검진 서류를 뗄 수 있는 파리의 의사들이 대부분 바캉스 중. 며칠 동안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다, 간신히 의사 한 명을 찾아 약속을 잡았다.

집에서 40분이나 떨어진 곳을 찾아가 고작 2분 만에 검사를 끝내고 36유로(약 4만 7천 원)를 지급했다. 그리고 한숨 돌리며 돌아서는 나에게 의사는 '운이 좋다'고 말했다. 자신도 이틀 뒤면 늦은 바캉스를 떠날 예정이라며, 만료 당일에 이렇게 처리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듯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전했다. 즐거운 바캉스 되라며 답인사를 했지만, 8월에는 아프지도 말아야겠다는 다른 의미의 다짐을 한 날이기도 하다.

(사실 이 공공 서비스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속 터지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다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4년 전, 치열한 성수기를 보내고 아직 여름이 남아있던 어느 날, 당일치기로 노르망디 바다를 다녀왔다.

많은 사람이 별처럼 반짝였다.


"바캉스를 위해 사는 프랑스인"  

1936년 세계 최초로 프랑스 노·사·정은 임금인상, 노동시간 주 40시간(현재 35시간)으로 단축, 연간 2주의 유급휴가(현재 총 5주, 주휴일 포함) 의무화 등을 담은 '마티뇽 합의'를 만들어 냈다. 어쩌면 이들이 바캉스를 신성시하는 건 당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신성시하는 바캉스 동안 특별하게 하는 것도 없어 보인다.  

바닷물에 들어가고 몸을 태우거나 책을 읽고 일행과 떠드는 행위가 대부분이다.

휴가를 떠나오는 사람들은 일하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에 만족하는 느낌이 든다.


원래 "바캉스(Vacance)" 란 말의 어원은 많은 유럽어가 그렇듯 라틴어에서 찾을 수 있다.  

"바카티오(Vacatio) :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비우는 것"에서 출발했으며, 영어로는 "베이컨트(Vacant) : 비어있는" 형용사로 쓰인다. (vacation도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딱 그 어원에 충실한 행위가 아닐까.


오래전, 프랑스 친구가 물었다.

"넌 프랑스에 왜 왔니? 심지어 좋은 회사를 관두고 말이야. "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고, 헤밍웨이의 찬사처럼 파리에 산다는 것이 매일 축제 같을지 느껴보고 싶었다.

당연히 매일이 축제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제는 이곳이 더 편해졌다. 09시에 문을 연다 쓰여 있지만 09시 10분 즈음 문이 열리고, 18시에 문을 닫는다 쓰여 있어도 17시 45분에 문을 닫는 곳. 아마 출근 지하철이 연착돼서 조금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약속 시각보다 원래 10분 정도 늦게 도착하는 것이 프랑스 에티켓이니 그러려나 하고는 웃고 넘기기도 한다. 타고 있는 승객의 편의보다 타려는 듯 말려는 듯 버스를 붙잡고 노선을 묻는 사람에게 하나하나 알려주는 기사님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곳, 타고 있는 누구도 짜증을 내지 않고 오히려 저 노선이 더 좋다고 외치는 사람도 있다. 이곳이 더 편해졌다는 것은 익숙해졌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느긋함에 익숙해진 건 나에게만 해당한다.

누군가는 긴 비행을 하고 도착하는 날 바로 투어를 나오기도 하고, 젊을 때 루브르 박물관을 오고 싶었지만 사는 것이 바빠 이제야 왔다는 분도 계셨다. 그들의 1분이 얼마나 귀한 시간일지 프랑스적 느긋함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것을 경계인이라고 부르는 걸까? 양쪽의 사회를 모두 경험해보고 영향을 받았지만, 어디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못한 존재.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올여름이 여름휴가를 떠날 수 있는 어쩌면 가장 큰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지만, 절약해야 하는 시간이 강제로 다가온 지금, 여행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S와 나에게 큰 고민의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바캉스를 떠난다고 해도, 그것이 '프랑스적 바캉스'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여전히 지식 혹은 경험을 채우는 여행을 하려 해, 어느 도시든 박물관 한 곳은 꼭 들러야 속이 풀리고, 기운이 없을 정도로 걸어야 여행을 하는 것 같다.  

여기서 10년쯤 더 살고 나면 이들처럼 이 부분도 익숙해질지 모르겠다.


그래도 한 번쯤은,

뜨거운 여름에,

나도 "비우러" 바캉스를 한번 가 보고 싶다.


Man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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