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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그라피 Jun 20. 2020

오스카 와일드 앞에서 만나요

남의 연애사를 빙자한 무덤 투어 이야기




S는 1년간의 파리 생활을 마무리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가기 전에 파리에서 어디 못 가본 곳 없냐는 질문에 '페르 라셰즈(Père-Lachaise)' 무덤을 못 가봤다고 답했다.


"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 공동묘지 가는 거 좋아해요."

"네?"


"저 대학교 때 배낭여행으로 파리 와서 거기에 가봤어요. 도어즈(Doors)란 팀의 짐 모리슨(Jim Morrison) 묘가 있다고 해서요. 고등학교 때 그런 반항아가 멋있어 보이잖아요.  

시대의 아이콘 무덤은 어떨까? 궁금했거든요.

여전히 사람들이 담배를 던져두고 가기는 했지만, 다른 무덤들하고 다르게 크게 화려하거나 독특하지는 않더라고요. 많은 사람은 파리를 상상하면 에펠탑이 떠오르지만, 전 파리하면 이 공동묘지가 먼저 기억이 나요. 그래서 속으로 엄청 반가웠어요. 이곳에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지금은 가자고 한참 설득해야 갈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고 있지만, 아주 가끔 무언가로 답답한 날 혼자 다녀오곤 한다. 공동묘지라고 해서 으스스할 것 같지만 사실 파리의 묘지는 대부분 정원식 스타일로 조성되어 산책하기에 좋다.  


얼마 전 만났던 목 작가님도 본인이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하신다면 페르 라세즈 공동묘지 투어를 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실제 프랑스에는 묘지에서 가이드로 활동하시는 분이 많다) 

사실 나도 좋아하는 곳이어서 투어 프로그램으로 언젠가는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개요와 동선을 만들어 뒀다고 맞장구를 쳤다.



- 1804년 5월 21일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세워짐.

- 루이 14세의 고해 신부이자 파리의 대주교였던 ‘페르 프랑수아 드 라 셰즈 (Père François de la Chaise 1624-1709)의 이름을 땄다고 전해지며,

세계 최초의 근대식, 정원식 묘지로 프랑스 건축가 브롱냐르가 설계함. (이후 유럽 각국과 미국에 선보인 공원식 묘지의 시초가 됨)

- 동선은 오스만 남작에서 시작해서 기욤 아폴리네르, 막셀 프루스트, 마리아 칼라스 등등




유명인의 묘비를 산책하듯 찾아가며 그들의 삶의 여정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삶을 반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조금 건방지더라도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극이 되지는 않을까?

10만여 기의 묘비는 모두 조각 공원처럼 다르게 생겼고, 유명했던 이라 해서 묘지가 더 크거나 화려하지도 않은 반 평의 크기에 잠드는 곳.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공동묘지(연간 200만 명이 방문한다)이기는 하지만 파리에 처음 오시는 분이 선뜻 선택하실지는 모르겠다.

너무 독특한 취향의 투어가 아닐까도 생각이 들어 쉬이 시작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이 더 크다.

하지만 누군가 '가이드님, 페르 라셰즈 어때요?'라고 묻는다면 정말 반가울 것 같다.  


"우리 오스카 와일드 묘비 앞에서 만날래요?"

S와의 첫 데이트였다.

우리는 각자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을 찾아갔고, 다행히 그 앞에서 만나 산책하듯 공동묘지 여기저기를 걸었다. 한 블록을 걸어 들어가면 제리코가, 그다음 블록으로 들어서면 쇼팽이 있었다. 파리를 사랑하고 파리에서 사랑했던 예술가들의 무덤을 바라보며 그들의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고 서로 취향을 공유했던 우리. 다행히 날씨가 좋았고, 몇 번 다리를 쉬어가고자 곳곳에 놓인 벤치에 앉아 쉴 때면 서로를 만나기 전의 파리 생활을 공유했다.


오스카 와일드 묘


그래, 죽음. 죽음은 정말 아름답지. 부드러운 갈색 흙 속에 누워 있노라면 머리 위에서는 풀이 물결을 치고 정적이 귀를 가득 채우지.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어. 시간을 잊고 삶을 잊고 평화를 누리는 것. 네가 나를 도와줄 수 있겠구나. 네가 나를 위해 죽음의 집 문을 열어 줄 수 있겠다. 너에게는 사랑이 함께하니까.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니까.

-  오스카 와일드 '캔터빌의 유령' 중


나중에 털어놓은 이야기지만, 약속 장소로 오던 날 S의 앞에 나와 체구가 비슷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걷는 뒷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혹시 저 사람이면 어쩌지?' 하고 고민하며 그의 뒤를 따라 걸었는데 다행히도 그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내가 아니어서 한숨을 놓았다고....


페르 라셰즈에는 작년 이후로 한참을 가지 못했다.

조만간 그곳을 찾아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며,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다시 만날 여행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도 고민해봐야겠다.


첫 데이트를 하기 전, S에게 "오스카 와일드 무덤 앞에서 만나요."라고 말했던 그 설레는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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