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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그라피 Jun 18. 2020

모더니즘과 쌀국수

13구


파리는 구의 이름이 1구, 2구와 같이 숫자로 붙여져 20구까지 있다. 

그중에 동남쪽에 위치한 13구에는 베트남, 태국, 중국 등 아시아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주로 모여 살고 있다. (한국, 일본 사람들은 서남쪽 15구에 많이 산다)

지하철역은 7호선 Place d' Italie(쁠라스 디탈리)역 아래로, 14호선 Olympiades(올랑피아드)역에서 내리면 가장 편하게 도착할 수 있다. 

이 지역은 파리 도시화 작업 일환으로 1960-70년대 건축가 레이몽 로페즈의 주도로 개발된 곳이다. 


파리에 처음 집을 구할 때 시간도 돈도 여유롭지 않아, 급히 외곽에 있던 어학원의 기숙사에서 지냈다.  

이후 건너 알게 되었던 유학생 부부의 권유로 그들의 남는 13구 아파트 방 하나에 셰어 하우스(프랑스어로는 Colocatoin, 꼴로까시옹 이라 한다)를 시작하게 됐다. 


13구, 창밖으로 바라본 모습은 "집은 거주를 위한 기계"라는 유명한 그의 말처럼 '르코르뷔지에 (Le Corbusier) 적 풍경'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어 보였고, 아테네 헌장에 충실하게 계획된 현대 건축의 신화가 실현된 모습. 


건너 건물에 보이는 어떤 방에는 2층 침대가 2, 3개 놓여 있었고, 방 하나에 몇 명이 지내는지 모를 정도로 남자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일찍 일하러 나섰고, 늦은 시간에 방의 불이 꺼지곤 했다. 

모더니즘 건축이 실현된 곳에 이주 노동자 삶은 모던 타임즈의 찰리같이 고단해 보였다. 

르코르뷔지에가 생각했던 인간의 삶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실현했던 건축이 인간의 삶을 그리 만들었다는 건 아니다. (한국은 오히려 부의 기준이니깐)


파리지앵들은 이런 건물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지, 여전히 오스만과 아르누보 양식의 18, 19세기 아파트가 더욱더 비싸다. 

그러니 경제적 약자인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이곳이 터를 잡기 더 쉬웠을 거라 예상한다.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지내고 여름이 한창일 때 나도 13구를 떠났다. 

지나친 기계적 미학이 지겨웠던 것은 아니고 S와 함께 살 집을 구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이유였다.

지금은 아시아 식당이나 아시아 식자재 마트를 가기 위해 가끔 가는 곳이 되었지만, 그 2층 침대의 누군가는 그곳을 벗어나 버젓한 방 하나로 혹은 집으로 옮겨 갔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그리고 르코르뷔지에가 환생해 13구를 찾아온다면 '쌀국수' 맛에 더 만족할 거라고 확신한다. 


S는 예전에 자기가 파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13구의 쌀국수 때문이라고 했던 적도 있다. 

지금은 다른 음식으로 바뀌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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