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이탄 Oct 24. 2024

이놈의 첫 글을 도대체 언제 올릴까

미루기와 완벽주의에 대하여

글을 꾸준히 쓰고 싶었다.

그래서 브런치 작가가 되기로 했다.

하지만 안 쓰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못 쓸 것 같은 마음에 가까웠다.

그래서 첫 글을 올리는 걸 한 달이나 미뤘다.


나는 미루기 대마왕이다. 대학 시절 교수님이 과제를 내주시면 보통은 마감일 자정부터 시작했고, 동 트는 창 밖을 바라보며 아침에서야 겨우 끝내곤 했다.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발등에 불 떨어져 만든 결과물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또, 한 달 전부터 시작하면 한 달 전부터 괴로운데, 하루 전에 시작하면 하루만 괴로워도 되지 않느냐는 괴상한 논리도 있었다. (그러나 과제를 시작하기 전까지 계속 미루고 있다는,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괴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미루기 대마왕도 회사에서는 을이라 마감 기한을 밥그릇처럼 지켜야 했다. 나도 밥그릇은 소중했는지 회사에서는 어찌저찌 마감을 잘 지켰다.개인적으로 회사의 가장 큰 순기능은 강제성이라고 생각한다.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은 회사에 자신의 9 to 6 (아마 그 이상..) 을 바쳐야 한다. 콩알딱지만한 평일 저녁 시간과 주말에 집안일도 하고 취미생활도 즐기려면 잡생각을 할 여력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회사에 있는 시간과, 회사 밖 에서 최소한의 일상을 살아내고 나면 일주일은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그 덕분에(?) 혼자서는 27년간 잡지 못했던 루틴이 자연스럽게 잡혔다.


그러나 얼마 전 나는 퇴사했고, 내 일상은 망망대해같은 무규범 속에 떨어졌다.

나는 또다시 천상천하 유아독존 미루기 대마왕 직위를 얻고야 말았다.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미룰까?

나는 회사에 다니지 않으면 기어코 혼자서는 생산적일 수가 없게 태어난 인간인걸까?

스스로에 대한 답 없는 의문과 일을 미룸으로써 오는 죄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있던 나는 생각했다. 이 미친듯 빛나는 황금기에, 온전히 나만을 위해 주어진 이 시간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고. 그래서 벌떡 일어나 짐을 챙겨서, 밝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통창 있는 카페로 왔다.




더 이상은 첫 글을 미룰 수 없어.

이 놈의 첫 글을 오늘은 제발 올리자.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첫 글의 주제가 이렇게 되었다.


자, 왜 나라는 인간은 그토록 미루는지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고.

생각을 파고드니 두 가지 이유가 나왔다.

하나는 완벽주의, 다른 하나는 잡생각이다.


나는 좋아하는 분야에 있어서는 꽤 완벽주의가 있다.(나머지는 놀라울만큼 대충 하거나, 아예 안 한다. 그래서 난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게 가장 현명한 처사일거고, 그래야 할 운명이다.) 글쓰기를 예로 들자면, 이 문장에 이 단어가 어울리는지 아닌지 수십번을 들여다보고,글의 전체 흐름이 매끄러운지 느껴보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쓴 글을 수십번 읽는다. 첫 취준생 시절에는 한 회사의 자기소개서 한 문항을 쓰는 데 최소 3일에서 7일이 걸렸다. 그렇게 마침내 글을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은 더할 나위 없다. 그 뿌듯함 때문에 괴로워도 쓴다. 하지만 글쓰기를 시작하려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 전까지는 '글 쓰는 내내 괴로운 시간이 펼쳐질 게 분명해!' 라면서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며 미룬다.


언제나 잡생각이 많은 것도 미루는 능력에 한 몫 한다. 나는 한 가지 생각에서 연상되는 다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쉽게 떠오르는 편이다.(지금 이 글에서도 한 문장을 썼더니 쌩뚱맞은 다른 주제가 생각나서, 다른 글로 빠졌다가 돌아오는 걸 수차례 반복해야 했다.내 작가의 서랍에는 이 놈의 첫 글을 쓰다가 딴 길로 새서 생겨난 글이 4편이나 된다. 그 글들은 아마도 평생 나만 읽을 운명이다.) 누구는 이걸 창의성이라는 좋은 단어로도 불러준다. 하지만 내 창의성이 남들보다 아주 월등하게 높거나, 건강한 방향으로 탑재했더라면 천재 예술가 소리를 듣거나 진작 성공했을 것이다. 슬프게도 둘 다 아니다. 결국 나는 아마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을 이 특성을 '건강한 방향'으로 탑재하기 위해 뼈 빠지게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잡생각이 많으니 글 한 편을 쓸 때에도 수 십 가지 주제가 떠오르고, 수 십가지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수많은 선택지들은 선택장애로 나를 인도하여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대 혼란에 빠진다.


'완벽주의를 버리세요'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실행하세요'


이 말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다. 말에 아무런 힘이 없다.

힘이 없는 말은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완벽주의와 잡생각을 내려놓으려면, 그걸 내려놓을 수 밖에 없는 규칙이 필요할 것 같다.

아마 앞으로도 브런치에 글을 쓰려다 도저히 소재가 안 떠올라 머리를 싸매고, 책상 앞에 앉으려다가도 눈을 피하며 괴로워할 나의 시름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몇 가지 규칙을 정해봤다.


1. 500자만 넘으면 괜찮다

일반적인 브런치 글에 비해 500자는 아주 짧다. 그치만 1500자처럼 기준을 너무 높게 정하면, 긴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시작도 하기 전에 아득해진다. 또, 기준을 정해두지 않으면 망망대해에서 허우적거릴 게 분명하다. 그래서 아주 쉬운 500자로 정했다. 이 글도 500자만 쓰자고 마음먹고 글자 수 세기 프로그램을 켜놓고 쓰기 시작했다. 지금 막 1800자가 넘어가는 중이다.


2. 70%의 완성도로만 쓴다

내 맘에 완벽하게 쏙 드는 주제, 문장, 단어를 기어코 찾으려고 몇 날 몇 일 애쓰지 말자. 지금까지 생각 안 났으면 앞으로도 안 난다. 그냥 적당히 좋은 주제, 문장, 단어를 가지고 일단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더 좋은 소재가 생각날 수도 있다. 그럼 그 소재를 가지고 다음 편을 쓰면 된다.


3. 당분간 지인들에게 브런치 계정과 내 글을 알리지 않는다

브런치 채널의 주제를 정할 때 '이 소재는 나만 쓸 수 있겠는데?' 싶은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쉽사리 시작 못하나 생각해보니, 그 안엔 두려움이 있었다. 글에는 내가 드러난다. 특히 에세이에는, 감추고 싶었던 내 약점도 드러난다. 인간은 타인의 24시간을 온전히 살아볼 수 없기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나쁜게 아니라 인간은 원래 그렇다. 그렇기에 지인이 내 글을 보고 나에 대한 편견을 갖거나 글 몇 편만으로 나를 속단하는 게 싫었다. 물론 브런치에서 누군가는 내 글을 읽게 되겠지만, 그래도 현실의 나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좀 더 마음이 편하다. 그럴거면 그냥 혼자 일기를 쓰면 되지 않겠냐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글쓰기를 하려는 이유는, 나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보이는 연습과 동시에 세상과 좀 더 맞닿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조금씩 천천히 나를 드러내는 것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고 싶다.

익숙해지면 괴로움도 덜해지니, 자연스럽게 점점 덜 미루게 되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