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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mping ink Jun 19. 2022

천백고지의 위로

26. 야생동물보호 표지판

먹고살기 바쁜 걸 서로 알고 있기에 연락조차 뜸해졌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야. 주말에 별 보러 가자."

급히 떠나기로 했지만 친구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밤하늘 가득 별 장판이 깔려있는 제주의 천백고지.

친구의 추천으로 찾아보게 된 낯선 장소였지만 여행후기들을 찾아보면 볼수록 마음을 빼앗겼다.

느닷없이 우리의 제주 여행은 시작되었다.


코로나 시기 이전에 밤도깨비 여행상품으로 불리던 해외여행이 많았다.

주말을 이용하여 직장인들이 금, 토, 일 여행을 다녀오는 상품들을 이용해 직장인들은 휴가 없이 여행을 즐기곤 했다. 그 시절 밤도깨비 여행처럼 우리의 제주 밤도깨비 여행을 계획했다.

계획적인 친구인지라 즉흥적인 여행에 한계를 느끼고 인근에서 술이나 마시자고 계획 수정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상상외로 제주여행은 차질 없이 진행되어갔고 우리는 어느새 김포공항 앞에서 서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무실에서 업무를 봐도 될 세미 정장은 여행객이라기보다는 업무차 제주에 떠나는 것처럼 보였다. 월요일에 조금이라도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바쁜 시기에 여행을 다녀와 업무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라는 주변의 시선을 막아내려 쇼핑백에 트레이닝복 한벌과 운동화 한 켤레만 가지고 여행은 시작되었다.


금요일 오후 제주에서 경차를 렌트했다. 앞서 말했듯이 둘 다 낯선 운전이 버거웠기에 작은 차를 선택했다.

내가 먼저 운전석에 앉았다. 아직 제주 시내를 벗어나지 않아 바다 한점 보이지 않았지만 친구는 창문을 열고 좋다 좋다를 연발했다.

저녁 허기가 몰려왔다. 그래도 제주에 왔는데 우리가 또 언제 둘이와 보겠냐 싶어 왕갈치 한상차림으로 배를 채웠다. 3~4인분은 족히 되어 보였지만 막무가내로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배는 볼록해졌지만 친구는 계속 허기진다며 주전부리를 찾아댔다.

"해 지기 시작한다. 천백고지 네비 찍고 가볼까?"

"너무 일찍 가면 별도 안 보인다더라. 커피나 한잔 더 하고 가자. 제주에서만 파는 한정판 있더라."


저녁 8시가 넘어서고 카페를 떠나 친구는 운전석에 앉았다.

큰 도로를 지나 목적지까지 좁고 구불거리는 도로가 시작되었다. 점점 도로 옆에 불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상향 등을 올리고 달려야 조금 더 멀리 도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굽은 길을 내려오는 차에 방해가 되지 않게 상향 등을 켜고 끄기를 반복하며 친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내가 운전할까?"

"곁에 세우기가 더 어려워. 내가 조심히 갈게. 야생동물도 나오는 모양이다."

친구의 상향 등 불빛에 야생동물 보호표지판이 반사되어 보였다. 급히 휴대전화를 들춰 정보를 더 했다. 고라니가 자주 출몰하기에 사진을 찍어 올린 이도 있었다. 고라니는 빛을 보고 달려들기에 가능한 상향 등은 켜지 않고 달리는 것이 좋다고도 했다.

굽이 굽이 길을 몇십 분이나 걸려 올라갔는지 체감은 저녁 내내 올라간 기분이었다. 회전해야 하는 굽은 곡선도로에서 중앙선을 넘어오는 차도 있었고 속도 때문에 우리 역시 중앙선을 살짝 넘어가기도 했다.


"인생 같지 않냐? 상향 등이 있어도 두려운 마음."

친구의 목소리가 굽고 어두운 길처럼 낮게 깔려 왔다. 

"좀만 힘내. 정상에 별들이 그렇게 장관이라더라."


제주의 까만 하늘에 괴로움을 숨기고 수놓은 듯 박힌 별빛으로 위로받길 바라며 친구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고민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친구의 한없이 조심스레 운전하는 굽은 길과 반짝이는 별빛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괴로움이 와닿았다. 

친구의 마음속에 최선 뒤에 남겨진 아픔이 잘 아물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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